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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Nov 15. 2019

눈과 고양이와 크리스마스

근황이야기



1. 월동 준비



얼마 만에 남기는 근황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근황을 남길 땐 두 가지 경우다. 기록을 남기고 싶을 만큼 엄청난 일이 있었거나, 다른 글을 써야 하는데 잠깐 도피하고 싶을 때. 오늘은 두 번째 경우. 도무지 다른 글이 안 써져서 손가락 좀 풀 겸(?) 해서 찾아왔다.


아주 가끔 이렇게 아무 말이나 남기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정말 손가락이 풀려서 리듬 타고 쓰려던 글을 쓰기도 한다. 오늘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얼마 전 남자친구의 친구가 우리에게 넷플릭스 아이디를 빌려줘서 잠깐 사이에 정신 놓기 일쑤다. 게다가 바깥엔 눈이 펑펑 오고, 벽난로 앞은 따끈하고. 여기에 넷플릭스라니. 큰일 났다.




11월 중순인데 이 눈발 실화냐. 아침부터 정말 펑펑 오더니 20cm 가까이 쌓였다. 어제 혹시 몰라서 장작들을 한가득 채워두었는데 거짓말처럼 나가기가 힘들 만큼 눈이 내렸다. 우리가 지내는 남자친구 가족의 별장은 깡촌 산속 해발 1000m가 넘는 곳이라 이렇게 일찍 눈이 내리고, 또 금세 많이 쌓인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계속 월동준비하느라 바빴다. 별장이 산속 깊숙이 있어서 집까지 배달해주는 곳이 없다. 근처에 사는 남자친구 누나네 집으로 배달 온 장작들을 차에 싣고 별장까지 나르는 작업을 며칠에 걸쳐 계속했다. 싣고, 운전하고, 내리고, 정리하고. 간단하게 들리지만 이 작업을 며칠 내내 대여섯 시간씩 반복하면 온몸이 쑤신다. '이런 곳도 아플 수 있나?' 싶은데, 얼마 전엔 엉덩이 근육이 아플 만큼 당기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2. D-41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월동 준비를 마쳤다는 건, 또 다른 걱정거리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우리에겐 약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제 눈길을 헤치고 시내로 나가서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아마 세 시간 정도 가게들을 돌다가 서로 짜증을 부리기 시작할 테고, 그마저도 인파에 파묻혀 제대로 목소리 높이기도 눈치 보일 테지. 하이고 크리스마스. 프랑스에 와서 한국의 세뱃돈 문화가 얼마나 편한 문화인지 알았다지. 돈 대신 선물을 전하는 게 훨씬 정감 있고 의미 있긴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선물 = 돈'이라는 공식으로 통한다는 게 문제지. 


그래도 작년부턴 남자친구의 아이디어로 획기적인 시스템을 돌입했다. 뽑기를 해서 한 가족은 다른 한 가족의 선물만 챙기는 걸로. 조카들 선물은 각자 알아서 하되 어른들끼리는 1 대 1로 선물을 주고받는다. 그럼 한 가족에게 몰아주기를 하는 거니 조금 더 값이 나가는 선물도 할 수 있고, 식구가 많은 가족인 만큼 선물 고민이 조금 줄어들기도 한다. 덕분에 작년 크리스마스엔 남자친구가 직접 만든 통나무 헤드 램프를 선물할 수 있었다(이걸 식구별로 다 만들려면...)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은 무척 뭉클하다. 아이들은 괴성을 지르며 포장지를 찢고, 나온 선물이 원하던 선물이던 값싼 선물이던 가리지 않고 행복해한다(이 행복이 오래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른들도 값을 따지지 않고 자신을 위해 골랐다는 마음씨에 감동하며 감사의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이 찰나의 감동과 행복을 위해 우린 거의 두 달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한다. 남자친구의 램프처럼 직접 만든 선물이면 가장 좋겠지만, 대부분은 가게에서 사는 경우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독특하고 유용한 선물을 하려니 값이 꽤 나가고, 그렇다고 지갑 사정에 맞추자니 늘 비슷비슷한 선물만 하는 것 같고(프랑스에선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 선물을 아주 많이 하는 편인데, 값에 비해 성의 있어 보인다는 장점 때문이 아닐까). 가족끼리 사이가 좋은 편이라, 서로의 경제사정을 대부분 꿰고 있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값이 꽤 나가도 좋은 선물을 하면, 상대방이 가격을 알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고민되기도 한다.


에구 글로 쓰기만 했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렇게 좋은 날, 1년에 몇 번 없는 온 가족이 모이는 아름다운 날. 그날이 다가올수록 기대되고 행복해야 하는데 이런 고민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괴롭다. 남자친구는 이 과정을 아주 옛날부터 겪어와서 그런지, 대놓고 크리스마스가 두렵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게, 남자친구는 누나가 넷, 조카가 무려 여섯이다... 




3. 연재와 인터뷰


이번 달부터 4개월간 <월간 비건>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오늘도 비건 하신가요'에 써둔 네 개의 글과 그림이 실린다. 그리고 다음 달엔 한 잡지에 인터뷰가 실릴 예정이다. 난생처음 인터뷰이가 되어보았는데, 서면 인터뷰여서 조금 아쉬웠다. 내가 지금 프랑스에 있으니 당연하지만... 언젠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멋진 기자님의 관심 어린 질문에 답해보고 싶다. 



4. 무계획적인 상태


내년엔 꽤 바빠지지 않을까 싶다. 계획해둔 일이 엄청 많은데 다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국에도 다녀와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 갈 수 있을까. 중요한 일 하나가 정해지면 그다음 계획들은 착착 날짜가 정해질 텐데 이 하나가 아직 안정해져서 죄다 '모름' 상태. 어째 늘 이런 식이다. 요즘은 '몰라'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한국은 언제 오느냐, 이번 겨울엔 어디에서 지낼 거냐, 크리스마스는 함께 보낼 거냐, 내년에도 밴에서 지낼 거냐, 아기는 언제 가지냐(응?) 등등... 난 '몰라요' 하고 답하는 게 자유롭게 느껴져서 좋은데, 남자친구는 확실한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 같아 스스로 답답한 모양이다. 가끔 이 주제로 우울해하기도 하고. 


이럴 때 보면 우리 둘 성향은 무척 다르다. 난 평생을 계획적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이런 무계획이 오히려 편안한데, 남자친구는 '자기 인생은 오로지 자기책임'이라는 성격의 사회에서 자라서 그런지 조금 불안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만약 나 혼자 살았다면 지금처럼 맘 편하게 지내진 못했을거다. 두 사람이기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해도 어느 순간 둘 중 하나가 해결책을 마련해 오기도 한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거나, 기다려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무계획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5. 세상에서 최고로


근황 쓰는 게 은근 재미있어서, 오늘도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눈 내리는 산속에서, 따뜻하게, 그리고 비건이면서도 아주 잘 챙겨 먹고산다 등등의 말을 남기고 가려 했는데. 올여름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지금의 추위를 최대한 즐기고 싶다. 옷을 벗어도 벗어도(!) 끝없는 더위 지옥에 갇힌 것 같았던 며칠을 떠올리면, 자고 일어나 코끝이 시려도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 된다. 게다가 요즘엔 배 위를 덮여주는 고양이 난로와도 함께 잔다. 아침에 일어나 잠결에 뻗은 손끝에 고양이 털이 만져지면 입술이 쏙 모아질 만큼 행복한 표정을 짓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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