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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May 17. 2020

정말, 정말로 굶는다는 것은

오늘도 비건하신가요


“그래, 한번 해보지 뭐.” 그리고 나는 이 대답을 약 사흘간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게 된다. 사건은 시작은 이랬다. 남자 친구는 평소 환경, 건강, 자연에 두루 관심이 많은 편인데, 내게 자주 장기간 단식을 권해왔었다. 내게 단식이란 다이어트의 가장 극단적이고 비효율적인 방법으로만 인식되어 있었는데, 알고보니 체계적인 장기간 단식은 치유 목적으로 자주 이용되는 방법이었다. 몸의 독소를 빼내면서 아픈 부위가 치유되기도 한다는 말에 살짝 혹한 것이 화근(?)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생긴 손목 터널 증후군에 최근 어깨 통증까지 더해져 꽤 고생을 했다. 시술도 받아보고 민간요법, 재활 치료까지 받았지만 신통치 않아서 고민이었기에 이참에 한번 해볼까 싶었던 것이다. 바보.


원래 제대로 된 단식은 약 1주일간의 준비 기간, 1주일간의 완전 단식, 1주일간의 회복 기간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동물성 식품, 설탕과 소금, 탄수화물, 식물성 단백질, 채소와 과일 순으로 천천히 줄인 다음 1주일간 단식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조금 번거로워서 이틀간의 준비 기간만을 거친 후 바로 단식에 들어갔다. 평소 철분이 부족한 편이어서 준비 기간동안 최대한 시금치나 미역 등을 열심히 먹고 시작했지만 그래도 첫날부터 어지럽기 시작했다.


어지럽고, 배고프고, 서럽다. 약 이틀은 이 느낌밖에 안 든다. 삼 일째가 되면 먹고 싶다는 욕구는 조금 사라지지만 몸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한다.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는데, 배가 쓰리고, 머리가 아프고, 온몸에 쥐가 자꾸 나면 정말 힘들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힘들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먹고 싶다는 유혹만 견딘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나가야하는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지를 않으니 밥을 할 필요도 없고, 필요한 잔잔한 일들은 미리 해둔 상태여서 여유롭게 책이나 읽으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며칠을 정말 완전 단식을 하면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격하게 말하자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힘겹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누워 있는 것도 힘들다(온 몸에 쥐가 나서). 안 아픈데가 없고 또 시간은 가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은 고사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드라마도 오래 보질 못한다. 머리가 아파서. 그냥 나는 왜 단식을 한다고 한건가 하고 후회하며 시간을 보낸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어떻게 하면 덜 아픈 자세로 앉거나 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문득 저 어딘가에서 굶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굶어서 죽는 사람들을 떠올렸을 땐 부끄럽게도 ‘아, 불쌍하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어볼 기회도 없었겠지...’하는 연민 정도에 그쳤다. 확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 사고를 당해 죽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 정도였다. 그런데 삼 일 정도 굶어 보니 굶어 죽는다는 건 죽음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죽음 중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난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희망도 선택의 기회도 없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진정한, 단식이 아닌 굶주림이란 무엇일까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워졌다.


현재 세계의 경작 가능한 땅의 3분의 1은 가축 식량 경작에 사용된다. 10억 인구가 굶주림에 시달리는 동안 한쪽에선 더 입맛에 맞게 먹어보겠다고 저 많은 땅을 동물을 기르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굶주림에 고통받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가축들에게서 나온 분뇨 처리장 근처에서 병을 얻으며 살아간다.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


지금까지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하루이틀 굶어본 적은 있었다. 정말 극도의 고통에 다다르기 전에 포기했었기에 별다른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몸이 정말 아프고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을 때까지 굶어 보면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고통이 내 건강을 위해서라거나 살을 빼기 위한 잠깐의, 선택의 고통이 아니라면. 그 고통이 다른 사람들이 그저 고기를 더 먹고 싶어서 내게 온 고통이라면. 언젠가 먹을 수 있다는, 아니 이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어서 사람답게 살아볼 수 있다는 희망조차 없는 고통이라면. 


단식이 끝난 후 푹 삶은 당근 하나를 입에 하나 넣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금도 치지 않은 자그마한 당근 하나를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음미하며 먹었다. 내 생에 가장 맛있는 당근 한 조각이었다. 이런 당근 하나를 입에 넣길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비건이 된 이후 처음으로 간절하게 생각했다. 제발, 공장식 축산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서 정당하게 음식이 나누어졌으면 좋겠다고. 제발. 제발.


굶주림은, 그저 불쌍한 일이 아니라 정말 가슴 깊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저기 지구 반대편에선 굶어 죽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편식하면 쓰나 -’정도의 말에 양념으로 더해지는 이야기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가 보다. 여태껏 늘 풍요롭게 좋은 음식만을 먹으면서 살아온 건 아니지만 굶주림에 허덕인 적은 없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쌀밥에 김치나 값싼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울 수는 있었다. 배가 고파서 서러운 적은 있었어도 배가 아프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몸이 나를 놓아버릴 정도로 고통스럽게 고팠던 적은 없었다. 


 단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 양파 수프를 끓이면서 처음으로 소금을 조금 넣었다. 평소 양파 수프에 정석대로 치즈를 조금 녹여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 친구도 이번에는 그냥 구운 빵만 얹어서 먹었다. 뭉근하게 조린 양파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단맛, 감칠맛, 매운맛. 거기에 오랜만에 소금을 조금 넣었더니 몸서리쳐지게 맛있었다. 며칠간의 고통에 보상받는 듯한 맛. 


며칠이 더 지나면, 몇 달이 더 지나면 난 이 감각을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굶지 않고,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고, 힘을 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입이 심심하다며 편히 음식을 찾을 것이고, 풍성한 재료를 보면서도 눈이 하트로 변하는 일도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고통의 감각, 굶주림의 감각은 남아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쉬이 잊기엔 너무나도 강렬했으니까. 다른 이들의 진짜 고통을 그저 연민으로 쉽게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 살아가고 싶다. 이 세계 어딘가에, 진짜 고통이 있다. 진짜 고통을 떠안고 살아가는,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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