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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가지현 Oct 27. 2024

나도 K-엄마입니다

국민학교 6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주제를 정해 방학 동안 탐구를 해서 보고서를 내는 ‘탐구 학습’이란 방학 과제가 있었다. 만들기로 대체할 수 있는 선택 과제였다. 여름방학에 만들기를 했었던 터라 겨울에는 탐구 학습을 해보기로 했다. 주제를 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발사였던 아빠의 직업을 설명하고 싶어서 ‘이발소 표시는 왜 적색, 청색, 백색일까’로 정했다가 두 줄 이상 쓸 거리가 없어서 그만뒀다. 그리고 몇 가지 주제를 더 고민하다 방학이 다 가버렸다.

 

“어린이들은 왜 TV프로그램 중 만화를 좋아할까?”

  

개학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오후 5시 30분. 뒹굴거리며 tv를 보다 결정했다. 놀다가도 이 시간이 되면 만화를 보러 가는 우리를 보며 생긴 질문. 이거다 싶었다. 설문을 하고, 통계를 내서 보고서를 쓰기로 했다. 근사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방학. 설문할 아이들을 어디 가서 찾나. 집이 가까운 몇 명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다고 가가호호 방문은 상상만으로 이미 힘들다.

     

혜연이네! 혜연이네는 학교 정문 옆에서 문방구를 했다. 문방구 안쪽으로 작은 방이 있었고, 방문 앞에서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앞쪽으로는 유리로 된 진열장이 있었다. 계산대 겸 진열대였는데, 고가의 문구류가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계산대 앞 바닥과 선반에 자질구레한 문구류, 장난감이 조르르 있었다. 문방구 밖에는 오락기가 있었다. 가볍게 즐기기 좋아 전교생이 오가는 핫스팟이었다.

    

결정했다! 추운 겨울, 문방구 계단, 방 앞에 대롱 앉아있다 아이들이 나타나면 호다닥 나가 설문조사를 했다. 날 보고 반가워하는 친구가 반, 깜짝깜짝 놀라는 친구가 반이었다. 학기 중 학교 앞 큰 오락실에 가는 친구 이름을 적어서 담임 선생님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었기 때문인데, 혜연이네 문방구 손님을 적어 알린 적은 없었는데도 그랬다. 놀라는 친구들을 진정시키고 설문을 했다. 처음엔 주관식이었는데 나중에는 몇 가지로 답변이 좁혀져서 객관식으로 물을 수 있었다. 어린이가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 1위는 “상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서”였다. 질문과 원그래프, 그리고 소박한 결론으로 한 장 짜리 보고서를 완성했다.

      

한 번씩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불안할 때가 있다. 주로 내 기준에 아이가 미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인데, 그 기준이 참으로 사소해서 말하기 민망하지만 꺼내 본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말이다. 아이 글씨체가 엉망이거나, 맞춤법 ‘ㅔ’,‘ㅐ’를 틀릴 때. 난 불안하다. 불안은 순식간에 5년, 10년의 시간을 흐르게 한다. 아이는 글씨체가 엉망이어서, 혹은 맞춤법을 잘 몰라 곤란한 상황에 처한 어른이 된다. 쓰고 나니, 생각만 할 때보다 더 민망하다.


또 있다. 침대와 하나 되어 숏츠멍하는 아이. 방문을 닫아 보고, 책을 넣어도 보고, 불러서 간식도 먹여 보지만 요지부동인 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불안하다.

    

이런 류의 불안을 잠재우는 나만의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문방구 앞 12살 나를 소환하는 거다. 질문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실패하던. 질문을 자꾸 바꾸다 보니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아 똥줄 타던. 보고서가 엄청 멋질 줄 알았는데 달랑 한 장이라 양을 늘리기 위해 원그래프를 크게 그렸던. 그래도 뭔가 뿌듯했던. 이 12살의 경험에 재미난 학교의 자유로운 배움을 겹친다. 나의 최선이라는 확신에 불이 켜지고 불안은 작은 기대와 안도로 바뀐다.

      

대안학교 부모는 다수와 다른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하지만, 또 대안학교 부모인 나를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싶다. 내 경험에서 최선을 길어 아이에게 주고 싶어 하는 평범한 K-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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