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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가지현 Oct 27. 2024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가도 가도 학교가 나오지 않는다. 낯익은 듯 낯선 골목이 끊길 듯 계속 이어진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해가 뜨거워졌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애써 침착해보지만, 가슴이 조이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이쯤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도 아니라고? 이상하다.


꿈. 꿈이었다.


재미난 학교는 2022년 겨울 학사 이전을 했다. 학교 연혁 페이지를 펼쳐보면 ‘학사 이전’ 4글자로 적혀 있다. 이 4글자를 무사히 적기 위해 2022년 재미난 구성원 모두는 고군분투했다. 다음은 학사특위 활동을 마무리하며 썼던 편지같은 글이다.

   



학사 운영으로 쓸 수 있는 학교의 총자산 X원 .

서울시 지원금 제외하면 현재 학사 월세 Y원.

학비 인상은 없거나, 최대한 적게.     

재미난 마을 인프라와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린다.

마당, 있으면 좋다.

전체 학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다.


살면서 이렇게 조건이 빡빡한 미션을 해본 적이 있던가.


학사특위 첫 회의에서 학사 이전 방식이 매매, 전세, 월세 중 어떤 것이 가능할지 검토했습니다. 재미난이 운용 가능한 자금과 현재 부동산 가격을 고려했을 때, 매매와 전세 가능성을 닫지는 않았으나,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알아보니 코로나로 인한 경기침체로 무권리금 상가가 공실로 꽤 있습니다. 권리금을 받지 못하고 장사를 접었어야 하는 상인들은 안타깝지만 그래서 저희가 검토할 수 있는 매물이 있었어요.


A. 00 옆 건물. 공간이 괜찮았습니다. 4층 건물에 1층과 2층 절반. 뒷마당이 넓었어요. 무권리 점포. 허나 주인집이 꼭대기층에 사는데 학교에게는 세를 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전체세(지하,지상4층)를 문의하자 제시한 보증금과 월세는 재미난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입니다.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마을단체를 알아볼까 했으나 그새 매물가를 또 올렸습니다.      

B. 3개층과 옥상이 매물로 나와있었습니다. 브랜드 까페에게만 세를 놓겠답니다.     

C. 골목 단독주택. 좁지만 마당이 있어 제2학사와 함께 운영해보면 어떨까 했는데 소나무 관리에 진심인 주인. 학교에는 세를 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D. 스튜디오로 쓰던 곳이라 공간이 단정하고 꽤 넓은 마당이 있습니다. 추진하던 도중 현재 임대인과 재계약이 이루어지면서 불발되었습니다. 근처에 프로 민원러가 산다는 제보도 받았습니다. 에구. 저 포도 쉬어요~    

E. 브런치 까페. 아름다운 학교와 가까운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 마당이 넓고, 건물이 큰데 가격이 괜찮습니다. 근저당이 수십억. 포기.     

F. 원룸 건물이 통으로 매매가 나와 구조변경이 가능한가 싶어 둘러보았으나 학교로 사용하기엔 각이 안 나오네요.      


그 밖에 마음에 드나 월세와 매매가를 감당할 수 없는 건물 다수.     

학교에게 세를 놓겠다는 곳.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곳. 구성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마음을 들었지만, 이 두 가지가 가장 기본일 수밖에 없더라구요. 저는 이 상황을 인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조금 더 기다리면, 조금 더 알아보면 현재 학사 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애가 닳기도 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매매를 하는 것이 필요한 타이밍이 아닐까 고민도 하고요. 다른 공간을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현재 학사가 좋아지네요. 지금까지 참 좋은 곳에, 괜찮은 조건으로 있었어요. 재미난이.

    

공간을 답사하시고 복잡한 마음이실 거라 짐작해요. 후보지 세 군데를 둘러보셔서 알겠지만, 장점만큼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는 곳이라 학사특위에서도 다른 곳을 찾으면서 2안으로 가지고 있던 곳이에요. 저는 학사특위를 하면서 몇 달 동안 하나둘 현재 학사가 가지고 있는 조건을 버리는 연습을 했어요. G일 경우엔. H일 경우엔. I일 경우엔. 혹은 다른 어딘가일 경우엔. 그런데도 결정해야 하는 지금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저보다 짧은 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니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드실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 우리가 선택한 대안학교 부모의 역할이 이렇게 버라이어티하네요.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다는. 살면서 이렇게 한 조직에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경험을 어디 가서 하겠어요. 아자! 지금, 이 문장들 맥락없다 싶으면서도 공감가죠? 다들 비슷한 마음일걸요? 혼자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긴 민망하니 명랑 버전의 결말을 추가해본다면) 믿는 구석도 있습니다. 까짓. 그곳이 어디든 재미난 구성원들의 상상력과 에너지로 새로운 공간을 채울 수 있잖아요. 우린 어디에서든 또 재미날 거니까요!     




꿈은 이 보고서를 쓰기 직전에 꿨다. 몇 달 동안 학사특위 위원 모두 애쓰고 애썼지만, 지내던 학사보다 조건이 좋은 곳을 찾지 못했다. 자책했다. 괜한 일에 나섰나. 나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이 학사특위를 했어야 했나.      

그러다 우연히 만들어진 이웃들과의 술자리. 꿈 이야기를 하자 걱정하지 말라며 말한다. 1학년은 누구네서, 2학년은 우리 집에서, 3학년은 또 어디서-그렇게 지내다 보면 우리와 인연이 닿는 학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직장 동료와 차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교장 호랑이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 통화를 듣던 동료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더니 말한다. 멋있어요. 교육 환경을 스스로 조직하고, 결정할 수 있다니.

   

글을 썼던 건 이 두 가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우린 혼자가 아니에요. 함께 사는 즐거움을 충분히 누려요.’

‘우린 스스로 길을 만드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그리고 신입생 유치에 유리하지 않을 수 있는 이 글을 굳이 여기에 남기는 건, 이 두 마음을 좀 더 많은 사람과 정직하게 나누고 싶어서이다.


"쉽지 않은 길이에요. 하지만, 즐겁고 자부심 가득한 길이랍니다.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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