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얼음

그 자리 그대로 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by 황지

비가 온 다음날 유독 많이 보이는 생명체가 있다. 제목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듯이 맞. 꿈틀꿈틀 지렁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 다음날, 혹은 조금은 수그러진 당일 저녁, 외출한다 했다면 그날은 지렁이를 밟지 않으려 유독 바닥에 집중해 걷는 날이 되겠다.



부천에서 청소년 파랑새 기자단을 했었을 때였을까. 영상 관련해 배움을 얻으러 간 곳에서 한 강연자 분을 만났었다. 지금으로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누군가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분의 강연 마지막 멘트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고 또렷게 기억난다.


말에 담긴 따뜻함과 눈에 담긴 진심의 레이저? 초음파. 이걸 뭐라 표현해야 딱 적절할까. 진심의 찌찌뽕무지개? 여하튼 말을 마친, 진심이 통했던 그 순간은 단전에서부터 심코 튀어나온 "와"라는 감탄사가 자동으로 새어 나기 충분했다.



"땅을 보고 가다 동전을 줍는 행복도 물론 크지요. 하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보다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꿈을 꾸고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시길 소망합니다. 이상 강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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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렇게 난 하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되, 지렁이를 밟지 않기 위해 땅을 유심히 살펴보고 걷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웃음)





어린 마음에는 지렁이에게 나름의 선의를 베푼 기억도 있다. 물론 지금 보면 이는 지렁이가 원치 않았을 수도 있는, 오롯이 내 관점에 기초한, 일인칭 선의일 테지만 말이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몸을 구부렸다 폈다 어디론가 묵묵히 향하는 지렁이가 괜히 안쓰러워 지렁이의 이동 방향에 따라 한 5분 정도 우산을 씌워준 적이 있었다. (지렁아 너의 촉촉함을 방해해서 미안해)




그때 드는 생각은 비가 와 숨이 막혀 흙 위로 나온 지렁이지만, 그저 잠깐 나온 그 위에 서 있거나 가까운 주변만을 맴돌다가 물이 좀 빠지면 다시 흙 아래로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였다. 그러면 체력도 비축해 생명도 유지해 아주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여기저기 움직이다가 오토바이 바퀴 혹은 사람 신발에 밟혀 죽기도 하고 혹은 운 안 좋게 이동 중 넓은 콘크리트 바닥을 만난 지렁쓰는 그대로 날이 밝으면 어디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해 그대로 말라가며 생을 마감하니까 말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몇 걸음 안 가서 지렁이 한 마리

또 저기 기어가고 있는 지렁이 둘

저 멀리 지렁이 셋


지렁이 특징 1) 촉감은 뛰어나지만 시력은 좋지 않다.

지렁이 특징 2) 뒤로 못 간다. 후진이 안된다.


자신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얼마나 이동했는지 알 방법이 없어 외딴곳에 가 있기도, 위험한 곳에 놓인다라.. 그렇다면 지렁이도 4렁(사람이 아니니까)1조로 다니며 동서남북 서로 방향을 낑차낑차 돌려주며 다녀도 좋겠다. 조물주는 부러 개체 수 조절을 위해 지렁이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사실상 지렁이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다고 해서 안 죽는다는 확률도 없고 움직인다고 해서 마냥 죽는다는 하기도 애매한, 확률 상의 게임임은 분명한 듯 싶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보면 모든 지렁이들은 베팅 정신이 강한 생명체라는 생각도 든다. 여러가지 요소를 따지지 않고 당장의 앞만 보고 직진하는 지렁이가 대단하면서도 행복했으면 한다. 객관적인 지렁이도, 주관적인 지렁이 같은 유형의 사람들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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