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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눈박이엄마 Oct 01. 2020

RBG 죽음, 트럼프 재선플랜,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


첫 대선후보 토론(이라기보다는 거의 개싸움)에서 트럼프에게 '제발 입 좀 닥치라'는 기억에 남는 공격을 했던 바이든. 바이든은 경선 토론 때 들쑥날쑥한 퍼포먼스를 보였고 워낙 트럼프가 개싸움의 대가(?)라 우려가 많았지만 그나마 냉정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잘 답변을 했다는 평가다. 바이든은 특히 그에게 닥친 어려운 질문에도 거의 답변했다.


어려운 질문이라 함은, 민주당 내 진보세력(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OC))을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트럼프가 민주당내 진보세력의 표를 바이든으로부터 떨어뜨리기 위해 던진 질문들이다.


바이든은 이렇게 답했다.


-AOC가 밀고 있는 '그린뉴딜'과 자신의 '그린 잡스(Green jobs)' 프로그램은 다르다.


AOC의 그린뉴딜과는 달리 바이든의 그린 잡스 프로그램은 환경과 관련된 양질의 일자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전국적으로 들끓은 흑인 시위 이후 인권단체 사이에서 불거진 경찰 예산 삭감(defund the police)요구에 대해 예산을 삭감하지 않겠다. (엄밀히 말하면 예산을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겠다)


-아들 헌터 바이든이 "마약 문제가 있었으나 지금은 극복했다" 등이었다.


그런데 바이든이 트럼프와 토론 진행자 크리스 월레스의 압박에도 끝까지 답변하지 않은 딱 한가지 질문이 있었다.


"대통령이 되면 대법관을 추가로 더 임명할 겁니까(pack the court)?"


court packing 을 처음 시도한 ,뉴딜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한 루즈벨트 대통령 (출처: history.com)


이건 사실상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해 기존의 정치 룰을 깰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트럼프가 3년 반 내내 시도해 온 것이다. 대통령 권력을 최대치로 확대할 수 있도록 충성스러운 법무장관을 앉혀 놓기까지 했다.


왜 바이든은 '대법관 수를 늘릴 거냐?'는 도전적인 질문을 받게 된 걸까? 그 정도로 미국 민주주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게 미 정치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BG) 대법관 타계가 그 불을 붙였지만 사실 그 문제의 뿌리는 매우 깊다.


1.


미국 대법원은 9명 종신직으로 구성되어 있고 임신중절을 비롯한 여성 권리, 인종차별, 정치와 종교의 분리 등 첨예하게 보수-진보진영이 갈라지는 이슈를 비롯해 논쟁적인 선거 이슈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리는 곳이다. RBG가 타계하고 그 자리에 트럼프가 지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이 임명되면 보수 성향 대법관이 6명으로 절대 다수가 된다.


카톨릭. 7명의 아이 엄마. 다운증후군 아이가 있는 배럿 판사. 매우 보수적이며 RBG와 이념적으로 정반대였던 스칼리아의 연구원이기도 했다


2.


민주당은 대법원과 악연이 있다. 2000년 부시와 고어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자리가 달려 있던 플로리다주의 재검표를 대법원에서 불허함으로써 부시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고어는 전체 표수에서 앞서고도 부시에게 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긴즈버그가 소수자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즐겨 쓰던 수정헌법14조("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짐")를 이번엔 거꾸로 보수성향 판사들이 "재검표를 요구하는 쪽의 한 표가 그렇지 않은 쪽의 한 표의 권리보다 더 우위에 있지 않다"고 판결한 거다. 긴즈버그는 이 판결이 "미국 선거를 대법원에 맡기는 결과"가 되었다고 개탄했다.


The Atlantic이 2020년 대선을 예측하며 2000년 부시-고어 대결의 악몽을 떠올렸다


3.


민주당이 억울해할만한, 미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도 있다. 미국의 인종 구성을 보면 유색인종이 점점 많아지고 전체적 성향도 진보적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지난 24년 동안 미 대선을 보면 이런 인종 구성이 반영되지 않는다. 공화당 후보가 득표수(popular vote)에서 민주당 후보를 이긴 건 2004년 9-11 테러 이후 애국심 효과 덕분에 재선된 조지 W. 부시 때를 제외하면 단 한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절반의 기간 동안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전체 득표수에서 뒤지더라도 선거인단 수에서 이기면 되는 미국 특유의 투표인단제 (Electoral College) 때문이다.



4.


또한 인종차별이 뿌리깊은 남부 주들에서는 (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흑인 등 유색인종 유권자들이 투표하기 어렵도록 각종 주 법령을 만들어 놨다. (조지아에는 투표용지에 적어 넣는 이름의 철자가 틀리면 무효표로 만들어 교육수준이 낮은 흑인을 차별하는 법이 있다. 또한 등록한 이름과 투표용지 이름이 완전히 똑같지 않으면 무효표로 한다 -- 예를 들어 'Del Rio'와 'Delrio'를 다르게 인식하는데 이런 이름은 주로 유색인종에 많다.) 사실 RBG가 'Notorious RBG'란 애칭을 얻게 된 것도, 이런 구조적인 유색인종/소수자 참정권 차별을 주 차원에서 하지 못하도록 주 법령을 개정하려면 연방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법령을 대법원이 무효화하면서 RBG가 분노의 소수의견을 낸 것에 유색인종 젊은이들이 열광하면서부터였다.


왜 이번 선거에서는 투표가 공평하지 않은가 / 뉴욕타임즈


5.


이런 현실에서 대법원이 대선에서 정치적인 '캐스팅 보트'까지 되는 건 민주당의 악몽이다.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하는 시스템에서 트럼프는 자기 입맛에 맞는 대법관을 2명이나 입성시켰고 이제 RBG 사망으로 1명을 더 임명할 찰나다. 대법관 임명은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 -- 기독교, 총기소유권 확대 지지자, 보수적 백인층 -- 을 들끓게 할 수 있고, 코로나 책임론으로부터 관심 분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이벤트다. 트럼프가 틈만 나면 없애려 했던 오바마케어를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 줄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대법원이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사건이 일어나면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판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


트럼프는 9월 말 기준으로 바이든에게 6-9%포인트로 뒤지고 있다. 10%포인트까지 차이가 벌어진 여름에 비해서는 다소 좁혀졌지만 여전히 열세다. 그래서 트럼프가 밀기 시작한 게 '우편투표에 부정투표가 많다'는 가짜뉴스다.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하게 이 가짜뉴스를 밀고 있느냐면, 자기 지지자를 미 우정사업국장으로 앉혀 놓고 우편투표를 처리할 기계를 사거나 교체할 비용을 지원하지 않는다. 0.00003% 정도로 낮은 부정투표 가능성을 크게 부풀려서, "트럼프 이름이 적힌 우편투표 뭉치가 쓰레기장에서 발견됐다"는 식의 가짜뉴스를 자신의 지지자층 사이에 퍼뜨린다.



7.


트럼프가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과정은 아주 조직적이다. 트럼프가 가짜뉴스를 트위터로 떠든다. 그러면 폭스뉴스의 터커 칼슨이나 숀 해니티 같은 극우 정치쇼 진행자들이 파시즘 정부에서나 볼 듯한 '분열적인 언사'를 쓰면서 확성기 역할을 한다. (폭스의 분열적 언사가 어느 정도냐면, ‘비건 버거 출시’를 폭스뉴스에서'고기와의 전쟁'이라고 묘사한다. 즉 모든 것을 ‘전쟁’, ‘대결’이라는 언어로 승화시킨다) 가뜩이나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에서 '내 입맛에 맞는 컨텐츠'만 추천되는 알고리즘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더욱더 필터 버블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가,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바꾸어야 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아이러니한 게 이들 소셜미디어 기업들에게 무한정의 자유와 면죄부를 준 건 다름아닌 오바마 정부다)


PBS 아만포어 프로그램에 출연한 <소셜 딜레마> 다큐멘터리 주역인 트리스탄 해리스 (전 구글 디자이너)와 다큐 감독


8.


이런 식으로 트럼프는 계속 가짜뉴스를 활활 태우면서, 자기가 이기는 게 아니면 모든 게 부정선거라면서 '선거도 안하고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이 됐다. 이게 결국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될 거라고 트럼프는 믿는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가장 극단적인 트럼프 재선 시나리오는 대강 이렇다.



- 코로나를 두려워 않는 트럼프 열혈 지지자들이 현장투표를 많이 하여 트럼프가 현장 득표에서 이긴걸로 나온다. 트럼프는 본인이 이겼다고 떠든다.


- 코로나 우려로 우편투표 비중이 높은 데다가 트럼프(+공화당 주들)가 우편투표하기 매우 어렵게 만들어놔서 우편투표 결과가 대선날짜 일주일 후에야 나온다. 이렇게 되면서 바이든이 최종 승리한다.


- 트럼프가 불복한다. 특히 경합주에서 트럼프와 바이든 득표수차가 별로 안나면 트럼프가 '부정선거'라고 주장한다.


- 어떤 주들의 경우 아예 주에서 진행한 선거 자체가 무효화된다. 트럼프는 법무장관과 대법원을 동원해 날짜를 질질 끌 것이고 기존 대선 결과가 사실상 무효화된다. 대선 당선을 위해 필요한 270표의 투표인단 숫자에 두 사람 모두 미달한다.


- 각 주에서 선거인단을 선출해 각 주당 1표를 주고 하원에서 대통령을 뽑게 된다.



- 공화당이 주의회를 장악한 주가 26개주, 민주당이 23개주다. (펜실베이니아주의회는 공화/민주당이 정확히 절반을 갈라서 차지하고 있다) 26표 이상을 획득해야 대통령이 되므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다.


트럼프가 꿈꾸는 재선 시나리오 - HBO의 The Plot Against America


9.


위의 내용은 HBO 극영화에 나왔던 매우 극단적인 시나리오다. 그러나 트럼프가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미국 정치 평론가들은 이렇게 되면 "미국 민주주의의 종언이다. 이 지경까지 안가게 해야 하고, 이런 일이 있다면 분연히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10.


이런 반칙에 능한 트럼프와 상원의 미치 맥코넬 공화당 원내대표를 막기 위해 민주당도 정권을 잡게 된다면 대법관 수를 늘린다는 반칙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요즘 미국 민주당의 분위기다. 대법관 수를 늘리자는 이야기는 뉴딜정책이 생각처럼 잘 추진이 안되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도하려 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렇게 상대 정당을 막기 위한 꼼수로 사용된 적은 없다.


이런 식의 반칙을 가장 경계하는 이가 아마도 타계한 RBG였을 것이다. RBG는 헌법조항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여권 신장에 기여했으나 그 반대편에 있는 주류 계층(=남성)을 원칙 안에서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성의 입장을 통역하는 통역사에 가까웠다. RBG가 민권단체에서 남성들이 자신의 성별 때문에 차별받는 케이스를 많이 맡았던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따져보면 RBG의 판결이 언제나 진보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50개 주에서 낙태를 거의 합법화한 1973년 로 vs 웨이드 판결에 대해 RBG는"그렇게 갑자기 확 합법화하기보다는 각 주의 법률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뜯어고치는 게 낫지 않았겠냐"고 했다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여론에 직면한 적도 있다. RBG는 자신과 이념적으로 반대였던 스칼리아 판사와도 친하게 지냈다. 논쟁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설득당하기도 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반대편을 설득함에 있어 절차를 중요시하고 반칙하지 않으며 합리적으로 타협하는 ‘점진적 개혁’이 때로는 필요한데 이게 미국 정치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는 양당 모두의 탓이라고 정치평론가들은 분석한다.


엄밀히 말하면 점진적 개혁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반칙은 분노를 일으킨다. 그런데 상대방이 반칙한다고 나도 분노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트럼프가 대법관으로 추천한 에이미 코니 배럿은 겨우 48세인데도 ‘보수의 아이콘’이 됐다. 그 이유가 뭘까? 민주당 상원 법사위 최고참 의원인 다이앤 파인스타인의 태도 덕분이란 얘기가 있다.


2017년 배럿의 항소법원 판사 인준 때 파인스타인 의원은 배럿의 가톨릭 신념을 문제삼으며 “도그마가 깊숙히 박혀 있다(The Dogma lives loudly within you)”고 발언했고 이게 보수주의자들을 자극했다.



물론 민주당이야 2016년 오바마가 추천한 중도성향 대법관 후보를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에서 인준 거부하고 그 결과로 대법관을 무려 2명이나 트럼프 임기 중에 임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리고 백악관과 상원을 동시에 장악한 김에 이때다 싶어서 연방 항소법원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판사들을 꽂아 넣으려는 트럼프와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가 매우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민주당의 태도는 정치 양극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토론과 타협이 가능하고 점진적이면서 위대한 개혁을 이루어 낸 RBG와 같은 인물이 미국에서 또 나올 수 있을까?


'양당 타협’에 능했던 바이든이 대통령이 된다면 분열된 미국을 단합시킬 수 있을까?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민주당이 구원할 수 있을까? 개싸움하자고 달려드는 트럼프를 대선 토론에서 ‘광대’ ‘최악의 대통령’ 등으로 부른 바이든의 태도는 지금 미국 민주주의의 상태로 봤을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사실, 공화당원들을 설득 가능한 태도와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가진 민주당 정치인이 없지는 않다. 아 네... 그렇습니다. 앤드루 양.. 오늘도 기승전 앤드루 양... 미움 없이도 정치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앤드루양에 대한 이전 글

https://brunch.co.kr/@jeeminstory/13


11월 중순 정도가 되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 민주당은 여러 모로 억울하기도 하지만 원죄도 있긴 하다. (그 이야기는 또 나중에...) 그러나 지금 미국은 CNN 파리드 자카리아의 표현대로 '바나나 리퍼블릭'(1차산업 농산물이나 간신히 수출하는 정치후진국)이 되느냐 마느냐의 위기에 있다. 그래서 민주당을 응원하게 된다. 토론 룰도 가볍게 무시하고 모든걸 자신 입맛대로 바꾸는, 정말 파시즘으로 가고 있는 트럼프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가 궁금하다.


CNN GPS를 진행하는 파리드 자카리아. 미국이 바나나 리퍼블릭이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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