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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눈박이엄마 Oct 21. 2020

지하철에 앉아있을 때 앞에 선 사람을 한번만 봐주세요

앉을 자리가 안보이는 사람도, 아프지만 부탁이 힘든 사람도 있어요

어느 날 저녁 약속을 위해 지하철에 앉아 가는 중, 흰 지팡이를 든 20대쯤 되는 남자분이 탔다. 내 자리 옆에는 빈 자리가 꽤 있었고 그 남자분이 선 곳엔 자리가 다 차 있었다. 흰 지팡이가 아니래도 텅텅 빈 자리를 놔두고 굳이 꽉찬 자리 앞에 섰다면 시각장애가 있을 거라고 익히 짐작이 가능할 텐데... 남자분을 마주한 7명은 아무도 올려다보지 않았다. 30초쯤 지켜봤는데 그분의 흰 지팡이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그분 옆에 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여기 뒷쪽에 자리가 있어요.

아, 자리가 있나요?

네, 뒤로 도세요.


그러더니 그분이 오른팔을 살짝 접으시더라. 팔을 잡아서 안내를 해 달라는 뜻으로 알고 팔을 잡아서 앉으시라 했다. 나도 옆에 앉았다.



어디 내리세요?

종로3가요.

음... 지금이 무슨 역이지..

아, 직장이라서 익숙해요. 제가 알아서 내릴 수 있어요.

아아 그러시구나. (다행이다) 지하철이 시끄러워서 안내방송이 잘 안들리기도 해서요



종로3가에서 그분이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혼자서 잘 내리셨는데, 점자블록을 따라가다가 점자블록을 밟고 있던 다른 사람과 부딪히셨다. 그 사람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는데, 앞으로는 점자블록 위에 서 있으면 안된다는 걸 알게 됐겠지.



시각장애인들 중에는 흰지팡이, 또는 안내견과 함께 다니는 분들이 있다. 안내견이 못들어가게 막으면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이다 (출처: 장애인고용공단 블로그)



지하철에서 누군가 앞에 서면 그분이 누군지 고개를 들어 보게 된다.



혹시 임산부나 어르신이나 영유아 동반했는지, 또는 짐을 많이 든 분은 아닐지, 장애가 있는 분은 아닐지, 그게 아니라고 해도 어딘가 아프고 불편해 보이진 않는지...


여자분들 중에 그런 분들 종종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생리통이 너무 아픈 경우가 있다. 겉으론 안 드러나지만 다리를 절거나 숨겨진 장애 때문에 꼭 앉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는 초기임산부 (임산부뱃지 단)가 지하철에 서 있는데 언뜻 봐도 너무 힘들어 보였는데도, 아무도 그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 끝에 있던 내가 가방을 자리에 두고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 "저 임산부에게 좀 양보하려고 하니 잠깐만요"라고 하고, 일어나 그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떄 얼굴이 환하게 바뀌며 연신 감사하다고 하던 그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분은 "내가 이렇게 힘든데 임신은 왜 했을까. 차를 갖고 다닐까"라며 힘들어했을지도 모른다. 차나 택시를 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이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양보를 받고 나면 "그래도 지하철 탈만하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는 좀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보기가 어렵다. 내 지인 중 주로 자가용만 이용하고 지하철을 잘 이용 안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임산부뱃지"이야기를 했더니, "그게 뭔가요?"라며 되물었다. (남자분이다)



본인이 여자가 아니고 지하철을 안 타면 임산부뱃지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도 한다... 


아... 임산부뱃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구나. 그 뱃지를 달기 위해 여자들이 얼마나 큰 결심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할수 없겠구나. 뱃지를 다는 심정, 나도 임신해봐서 너무 잘 안다. 내가 임신했을 땐 임산부뱃지 제도가 없었는데, 그 뱃지를 다는 것 자체가 지하철에 가면 누군가에게 '자리 내놔'라고 표시내는 게 아닐까 하여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거다. 


거꾸로 말하면, '죄송한데 제가 임산부라서요'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뱃지라도 달고 다니는 것 아닌가. 


장애도 마찬가지다. 휠체어나 흰지팡이는 그나마 남들이 나의 장애를 알 수 있는 기제라도 된다. 다리를 절어서 오래 서있지 못하는 지인이 있다. 이분은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어르신에게 호통을 들었다고 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지인 또한 노약자석에 양보받아 앉았다가 어르신이 일어나라고 하는 바람에 한참 싸웠단다. 


내가 지하철 일을 페이스북에 쓴 후 많은 시각장애인 분들이 공감을 해주셨다.


3시간 지하철로 출퇴근하는데 앉은 일이 드물었어요. 
저는 서울 시내 역에서 출발해서 천안까지 가는데 서서 가기도 했어요.



그리고 위의 임산부 뱃지를 달 떄와 똑같은 기분을 느낀다고도 하셨다. 



저는 자리를 부탁하기가 망설여져요. 자리 있느냐고 물어보면 제 흰 지팡이를 보고 그냥 양보를 해주시는데 마음이 불편하거든요. 안 보여서 자리 있느냐고 묻는 거지 반드시 양보를 해달라는 건 아닌데... 그래서 지하철 타면 그냥 기둥 자리가 비어 있으면 서서 가요. 


무작정 팔을 끌어 앉으라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다. 지하철에서 앉으면 그 자리는 무조건 내 자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번 봐달라. (물론 내가 힘들고 아파서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은 제외하고)


얼굴을 보지 않으면 이 사람이 불편하고 힘든지 모르기 때문에, 지하철에 앉고 누군가 앞에 서면 이사람이 임산부나 노약자나 아픈 사람은 아닐지, 낯빛을 살펴서 그분이 힘들어 보이면 "여기 앉으세요" 라고 해주면 어떨까. 자리가 있는데도 보이지 않아서 못 앉는 시각장애인일 수도 있다. 빈 자리로 안내해 주는 것만 해도 좋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그렇게 한번 내가 베푼 친절(친절까지도 아니다. 그냥 빈 자리에 안내하는 게 전부일 수도 있는데)이 돌아돌아서 휠체어를 타는 내 딸에게도 와주기를 바래서다. 휠체어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지하철 승강장 사이 간격 때문에 누가 밀어줘야 할 수도 있고,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잡아줄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가 꽉 차있는데 휠체어 먼저 타라고 내려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휠체어는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없음을 기억하자) 


둘째, 그렇게 내 딸이 밖에서 한 번 친절한 사람을 겪은 후 '다음번에도 나가봐야지'라며 용기를 내는 걸 내가 정말 많이 봐서다. 



일본 지하철에 붙어 있는 표지판. 출처 버섯돌이 세상 블로그


일본지하철역에는 '우선석'(우리로 치자면 노약자석) 앞에 '스마트폰을 끄시오'라는 안내 표지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앉아서 스마트폰에 집중하며 양보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페이스메이커 등 의료기기가 핸드폰 전파 때문에 오작동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진을 보면 전화기 옆에 가슴에 하트 표시가 그려진 사람 표시가 있다. 페이스메이커 등의 의료기를 단 사람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파가 나오는 2G폰이 거의 없어서 크게 문제는 되지 않고, 스마트폰때문에 배려를 안하는 다툼방지의 의미가 커졌다고 한다.


꼭 이런 표지판이 없다고 해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이 아닌 타인에게도 신경을 쓰는 건 많은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이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 것이 '세상에 대한 믿음'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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