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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Apr 24.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13 남자 사람 친구, 옌츠

             (비아나에서 나바레테까지-22.8km)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푸엔테라레이나의 알베르게였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그나마 아래층 침대를 선점하고 짐을 풀고 있을 때 흰머리의 인상 좋은 백발 신사가 들어섰다. 이층 침대의 아래층은 이미 다 찼고 계단을 서너 개 올라야 하는 이층만 남은 상황. 계속 동행 중인 한국인 미스터 최가 경로우대 사상을 발휘해서 자기 자리인 아래 침대와 바꿔줄까 했으나 괜찮다며 선선히 올라갔다. 그는 바로 전날 팜플로나부터 출발해서 두 번째 날이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코골이 백발 신사 때문에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 우이씨!


  다음 날 오전 7시 길을 나섰다. 일찍 서둘러 나갔지만 늘 나를 휙휙 지나 앞서고 마는 사람들. 그나마 백발 코골이 신사는 뒤에서 오곤 했다. 그래도 코스가 끝나가는 후반전이면 그도 나를 앞서가곤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담배 냄새를 뒤로 흘리면서. 다시 한번, 우이씨!
   

  셋째 날 백발 신사와 나는 또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차됐다 말았다 하며 같은 코스의 길을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가 내 옆으로 오며 인사했다. “Isn't it beautiful?(아름답지 않아요)”, 나는 “Absolutely!(정말로 그러네요)”로 맞장구쳐 주었다. 그와 나는 하늘빛이 막 바뀌어 가는 그 순간을 경탄하며 바라보며 걸어갔다. 이름을 다시 한번 물어보고 순례길 경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순례 8일 차와 3일 차가 무슨 군대 동기라도 만난 양 수다를 떨었다. 난 죽을 것 같던 첫날을 얘기해줬고 그는 첫날 코스를 피해 3일 차부터 시작했다며 싱긋 웃었다.
  

  동행자들의 첫 번째 질문은 대부분 어떤 이유나 목적으로 산티아고 순례를 왔냐는 것. 그는 직장까지 바꾸고 일을 줄여 뇌졸중에 걸린 아버지를 손수 돌보다가 지난해 아버지를 갑자기 여의었다고 했다. 직장에서 여러 변동도 있었고 아버님 상으로 꽤나 힘든 시기였다며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즐기기 위해 왔다고 했다. 나는 50세를 맞아 나에게 안식년을 주고 인생 후반을 리셋하러 왔다고 했다.
  

  그는 골프를 좋아하고 장성한 두 아이가 각자의 길을 잘 가고 있으며 자신은 15년 전에 이혼했다고 했다. 나도 인생 2막 설계를 위해, 아이들이 다 대학에 가서, 나를 찾아, 자유 등 불라불라...... 결국 둘 다 신상을 다 털었다. 옌츠는 묻지도 않은 개인적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역시 길 위에서 느낀 점들, 깨달은 것들을 가장 많이 솔직하게, 날 것 그대로 드러냈다. 길 위에선 국적과 나이, 성별, 결혼의 유무, 친분의 정도는 아무런 경계도 되지 않고 가볍게 뛰어넘어 서로의 가장 깊은 내면의 결을 거리낌 없이 보여줄 수 있음을 경험했다.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을 거라 생각했던 옌츠는 59세, 이혼남, DHL에서 20년 이상 일하고 그 뒤 비즈니스 스쿨에서 강의했다고 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적인 위치이나 그도 여전히 인생 후반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도전이 필요함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는 2,30대가 아닌 인생 후반에 맞는 설계를 위해 긴 여행 중이며 주변 지인들, 가족들이 800킬로미터 순례를 반대하거나 걱정했지만 그는 이 몇 개월의 시간은 인생 전체의 단 몇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해줬단다. 그래서인지 길 위에서 그는 전혀 바빠 보이지 않았다. 멋진 소나무 숲 그늘이 나타나면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며 쉬었다. 마을 카페도 들러 커피 한 잔, 담배 한 대의 여유를 즐기며 길과 함께 갔다.


  “인생의 문 하나가 닫혔다고 생각할 때 또 다른 문이 열린다.”
  

  길이 아니었다면 교과서처럼 들렸을 텐데, 많은 길을 지나 온 백발 신사의 말이 경험적 진리로 공명했다.  

  그는 수 킬로미터를 더 가기로 결정했고 난 멈추기로 했다.
  “Buen camino.”

  “See you on the road again.(길에서 또 봅시다)”

  ‘같은 숙소는 노 생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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