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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Apr 29.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15 ‘I don’t know’ 맨

     (아소프라에서 그라뇬까지-21.9km)

  그의 첫인상은 순정만화 속 남자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다. 캔디의 왕자님 앤서니 같은 호리한 금발에 미소년 이미지. 다른 순례자 그룹과 어울리는 듯, 따로 노는 듯 타인과 자신의 거리를 자유롭게 조정하는 듯 보였다. 내가 가는 코스에서 교차하기도 하고 같은 숙소였다가 아니었다가 그래도 길 위의 일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틀 전 도시 로고로뇨(Logorono)를 지날 때 잠깐 다시 만나 함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그는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산티아고에 왔다고 했다. 작은 디지털카메라와 아주 작은 스페인어 사전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여느 젊은 세대와 달라 보였다. 스마트폰 사용하는 걸 못 봤던 것 같다. 오늘 그가 같은 알베르게에 다시 나타났다. 오늘 알베르게는 오래된 교회 건물 한 곳에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빨강 머리 앤의 양할아버지와 아주머니 집에 있을 법한 클래식한 나무 그릇장이 있고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벽, 체크무늬 담요가 덮인 이층 침대까지.


  소년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살피던 그는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하나하나 찍었다. 키 큰 나무 그릇장과 벽에 붙은 교황님 포스터 사진까지. 20대 여느 젊은이 같지 않은 표정과 여유, 세심함이 남다르게 보였다.

 

  오늘 아침 아소프라를 떠나 그랴뇬으로 가는 초반에 그와 다시 교차했다. 그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염치불구하고 다시 물었다. 타이스! 영화관에서 일하며 영화를 다양하게 많이 봤고 한국 영화 <부산행>도 봤는데 무서웠다며 자기 취향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와 감독은 <엘리펀트 맨>을 찍은 데이비드 린치라고 했다.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있고 클래식 영화를 좋아한다고. 어쩐지 외모도 분위기도 자유로운 영혼 같다고 짐작했었다. 그는 대뜸 한국에서 살아가기가 어떤지 물었다. 난 ‘3포’에 대해 얘기해주면서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이런 우리나라를 ‘Hell Korea(지옥 한국 또는 헬조선)’라 부른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특히 상층과 하층 갭이 갈수록 커지고 중간층이 줄어들고 있다 했더니 자기 나라는 중간이 두텁다고 조용히 말했다.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도 “I don't know.”, 어느 알베르게에 묵을지 물어도 “I don't know.” 그러던 그는 따사로운 해가 비치는 벤치가 나타나자 조용히 “바이” 하면서 떨어져 나가 조용히 ‘혼밥’을 즐기고 때론 순례 루트를 벗어나 카페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순간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즐길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나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한낮 뙤약볕 더위를 피하려고) 그날 계획한 목적지까지 마치는 게 먼저다. 그러다 보니 중간중간 멋진 곳을 눈으로만 즐길 뿐 멈추지 않는 편이다. 젊은 그는 현재에 충실하고 나는 미래에 더 많이 방점을 찍고 사는 듯 보였다. 흠, 글쎄 그건 좋고 나쁨이 아니라 각자 취향이자 선택이 아닐까. 현재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그래도 앞을 내다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핑계를 대 보지만 옹색하다.
  다시 그를 길에서 만난다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어떤 영감들이 떠올랐는지 물어보고 싶다. “I don't know.”라 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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