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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y 07.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17 비우기

   (토산토스에서 아헤스까지 23.2km)


  어제 손이 얼 정도의 강풍을 뚫고 토산토스에 도착한 터라 추위에 움츠린 몸을 풀어주고 싶었다. 우리나라였으면 따뜻한 방 아랫목 이불속으로 들어가면 딱인데. 여긴 수십 개의 2층 침대에 보일러 파이프가 딱 두어 개 뿐이다. 게다가 정해진 시간에만 켜고 끝이다. 오리털 침낭이 없었더라면 정말 추웠을 거다. 대충 반만 씻고 침낭 속에 웅크리고 들어가 잠깐 누웠다. 저녁도 건너뛰고 새벽까지 잤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깨서 준비하고 나도 그들처럼 크루아상에 따뜻한 우유 한 잔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 메뉴는 빵과 음료수 정도밖에 없다. 이젠 밀가루도 가릴 처지가 아니라 일단 먹는 수밖에, 든든했다.
  

  다행히 어제 광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 그 자체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하니 파랬다. 비 온 뒤 구름은 영감을 받은 화가가 그린 듯 파란 화폭이 넘칠 듯 풍성했다. 그렇게 구름과 하늘이 맞닿는 길을 걸었다. 끝까지 걸어가면 하늘로 이어질 듯.
 

  오늘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 주앙 드 오르테가(San Juans de Ortega) 산을 거쳐 아헤스로 가는 코스다. 내가 걷고 있는 이 루트는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의 북부를 동에서 서로 가르는 800킬로미터 코스다. 스페인이 우리나라 면적보다 5배 이상 크다고는 하지만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초지와 포도밭, 설산으로 둘러싸인 풍광 탓인지 아메리카 대륙 같은 포스가 느껴졌다. 며칠 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포도밭을 몇 시간 동안 걸었고 오늘은 수 십 킬로미터의 소나무 숲길, 참나무 숲길이 한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여기에선 와인이 물보다 싸고 현지인들은 와인을 식사 때 이외에도 물 마시듯 수시로 마시는 것 같았다. 광활한 들판을 보면 절대 사람의 힘으로 경작하긴 어렵겠다 싶다.


  전혀 다른 새로운 자연환경, 풍광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묵은 것들이 밀려나고 새것들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비운다는 것은 이미 차 있는 것을 끌어내는 방법도 있지만 새것으로 자연스럽게 채우면서 낡은 것을 밀어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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