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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y 13.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18 재회

     (아헤스에서 부루고스까지 23.7km)

  

  준비운동까지 마치고 문을 나서자 비가 오고 있는 걸 알았다. 다시 판초를 꺼내 입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세찬 비가 아니라 다행이고 눈이 아닌 것도 참 다행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렇게 최악이 아닌 걸 알아채고 차선에 감사할 줄 알게 된 것. 길 위에서 최대 난적은 역시 날씨다. 너무 뜨거워도 너무 추워도 강풍도 강우도 모두 전진하는 데 방해꾼이다. 나의 노력이나 의지가 통하지 않는 불통.


  결국, 맞서지 않고 되도록 피하는 게 상수다. 비가 눈으로 변해 거센 바람과 함께 얼굴로 들이쳤다. 순례 시작 후 둘째 날 비가 종일 내렸다. 그 후 열흘이 지나서 두 번째 눈비다. 장기 순례 동안 언제고 다시 일어날 일이었다. 그때 첫 비의 경험이 두 번째를 견딜 만하게 한다. 실제 눈이나 비, 바람이 강할 땐 주위에 시선을 줄 여유가 없다. 그저 고개 숙여 발끝을 조심조심 옮겨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전부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우리 전체 인생길에 눈, 비, 바람과 햇빛은 총량의 법칙을 따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친다. 너무 과했다면 이제 더 이상 나빠질 건 없을 테고 아직 견딜 만하다면 아직 그 총량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 다만 그때그때 알아채지 못하는 건 인식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이틀 전 코골이 백발 신사 옌츠가 페이스북 메신저로 부르고스에 오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었다. 옌츠는 나보다 하루 먼저 부르고스에 도착해서 하루를 관광하며 쉬고 내일 아침 길을 다시 나설 예정이라고 했다. 저녁 식사를 기대하며 점심도 대충 과일로 때운 터라 약속 시간보다 미리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호텔에 있었는지 바로 답이 왔고 하루 먼저 온 그가 앞장서서 파에야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몇 번 허탕을 치고 나서야 나는 치킨 파에야를, 옌츠는 해물 파에야를 주문하고 그가 추천하는 와인도 시켰다. 그는 며칠 전 끝도 없는 포도밭을 지나면서 스페인의 대표적인 와인 라 리호하(La rejoha)의 흙 맛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진짜로 와인에서 흙 맛이 느껴진다면서 꼭 맛보라고 했었다. 드디어 오늘! 흠, 흙 맛은 잘 모르겠고 묵직한 보디감과 풍부한 향은 남다른 듯했다. 우린 와인 잔을 부딪치며 여기까지 온 우리 자신을 자축했다. 800킬로미터 중 300여 킬로미터를 왔으니 3분의 1이 넘는 15일 행군이었다.


  무엇이 특별했는지, 후회한 적은 없는지, 무엇을 알게 됐는지, 무엇이 바뀌었는지. 참 진지한 질문과 답들이 대화 속에 끊임없이 오고 갔다. 여행에서 만난 낯선 사람, 그것도 남자 사람과 이렇게 진솔하고 자유로운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산티아고 순례는 다른 여행과 다른 게 분명하다. 그도 여행에서 얻은 소소한 것들, 믿기 어려웠던 감동적인 경험들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방향 표식을 놓쳐 한 시간 가량 헤맬 때 나타난 또 다른 순례자, 세라가 자신을 구해줬고 거의 헤매듯 찾아간 마을 어귀에서 처음 보는 개가 마을의 숙소까지 자신을 인도하듯 동반한 것도 놀랄 지경인데 누군가 뒤에서 개와 그를 찍은 사진은 더욱 놀라웠다는 것이다. 모두 우연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 절박한 상황에 돌연히 나타난 도움의 손길들이 그냥 넘기기엔 너무나 믿기 어려운 감동이었다는 것이다.


  여행이 우리에게 준 많은 것에 우린 죽이 척척 맞았다. 음식을 앞에 놓고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이어간다는 게 가능했다. 남은 음식은 결국 싸서 들고 왔다. 서양에서도 남자가 음식 값을 지불하는 게 매너인지 모르겠지만 기분 좋은 만남에 대한 감사로 그가 내겠다고 나섰다. 우린 서로의 순례 여행을 격려하고 최종 목적지에서 또 만난다면 그땐 내 차례라고 말해뒀다. 내가 묵을 알베르게 까지 데려다주는 길에-밤하늘에 별인가 싶었는데- 풍등이 별자리처럼 뚜렷하게 하늘에 박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 또한 순례자들의 자유로운 여행길을 인도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알베르게 앞에서 악수하자고 손 내미는 내게 그는 볼 인사를 하며 “take care.”을 속삭여줬다.


  “Take care, you too.” (당신도 조심하세요)

  “Hope to see you in Santiago.” (산티아고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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