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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y 22.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21 미스터 최

         (오르니요스에서 카스트로헤리스까지 19.7km)


  지평선까지 펼쳐진 황량한 벌판 사이 한없는 외줄 흙길을 걷는다. 갑자기 눈물이 날듯 먹먹해진다. 이 광활한 들판, 외로운 광야, 내가 살면서 지나온 그 어느 시간들쯤이었던 것 같다. 끝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했던 외롭고 막막했던 시절들처럼.


  무기력도 연대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이 된다는데 이런 막막함과 외로움이 연대하듯 여기서 서로 알아보고 어루만지는 듯하다. 내 맘 깊이 결마다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미련, 아쉬움, 회한이 대자연 앞에서 토닥토닥 토닥임을 받고...... 그렇게, 메세타를 관통했다. 10여 킬로미터의 메세타를 지나 온타나스(Hontanas)에 도착해서 가장 맛있는 토르티야를 맛보았다.


  이제 나와 가장 오랫동안 동행한 한국인 청년 미스터 최**씨 얘기를 할 차례가 됐다. 왜냐하면 나를 앞질러 메세타를 통과하고 바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가, 뒤따라오던 또래 한국인 남녀를 따라나서며 나와 긴 동행을 끝냈기 때문이다. 생장에서 첫날 순례를 시작하며 만났지만 첫날은 서로 다른 동행자들과 함께했다. 악몽 같은 첫날을 치르고 롱스보 수도원에서 그와 나만 둘째 날 코스를 변경하고 중간 마을에서 쉬자고 결정했다. 순한 인상의 33살 **씨는 자신의 얘기를 선뜻 먼저 꺼내지 않다가 셋째 날에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냈다. 태권도 사범으로 해외(모로코, 호주 등)에서 사역을 하는 기독교 선교사이고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카미노를 하러 왔다고. 선교사이긴 하나 여전히 자신이 맡은 미션과 믿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 같다며,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한 외로움도 토로했다. 게다가 학창 시절부터 운동하며 몸을 막 쓰는 바람에 건강상의 문제도 많아서 제 또래 30대만큼 빨리 많이 걸을 수도 없다며 나와 동행하게 됐다.


  순례 둘째 날부터 함께 다녔지만 시작과 도착지만 같을 뿐 길은 각자 자기 페이스로 걸었다. 그러다가 페이스가 맞으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같이 걷기도 했다. 걸을수록 그도 강건해지며 나와 스피드 차이가 크게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동행 초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편지를 건네며 보관을 부탁했다. 자신에게 쓴 편지인데 카미노 800킬로미터를 완결하는 날 되돌려달라는 거였다. 흠, 순수한 청년의 부탁을 나도 선뜻 들어주고 보름 정도 내 가방 깊숙이 보관했다.


  둘이 같이 다니다 보니 다른 순례자들이 커플이냐고 묻기도 했다. 30대와 50대 남녀가? 어떨 땐 어수룩해 보이기도 하고 담요 크기의 은박지를 몸에 두르고 따뜻하다며 부스럭거리면서 잠자기도 했던 **씨. (자면서 뒤척일 때마다 은박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긴 했다.)


  **씨와 나는 동행을 끝내기 이틀 전날 함께 오래 걷게 됐다. 그때 **씨는 마지막 속 얘기인 듯 좋아하는 후배 얘기를 꺼내며 여자들 마음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같은 태권도 선교 사역을 하는 후배와 오랜 기간 동지 같은, 좋은 선후배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그 마음이 다인지 그 이상의 감정인지 모르겠다며.


  내가 연애박사는 아니지만 당장 그 후배를 만나러 가라고(페루에서 태권도 사역 중), 산티아고 카미노가 아니라 페루로 먼저 갔어야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길을 재촉하느라 먼저 갔을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헤어지고 또 만날 수 있는 길이지만 보름 이상 함께 동행한 사람이 갑자기 제 갈 길 가버리고 나니, 헐, 이건 또 뭔지...... 마음이 착잡했다. 그의 편지도 돌려주었고 빌려준 내 가방 커버도 돌려받았다. 서로 뭘 약속한 것도 없었고 원래 알았던 사이도 아닌데, 내가 그를 의지했던 모양이다. 낯선 곳에서 같은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안도하고 안심했나 보다.


  이제 완벽하게 혼자다.

  다시 나의 여행을 시작하는 느낌이다.

  Buen Camino!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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