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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y 31.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25 & 26  1승 1패

(테라디요스에서 베르시아노스까지 24.4km &

베르시아노스에서 만시야까지 26.6km)


  55세 독일 여성과 단 둘이만 한 방에서 코골이 없이 편안한 잠을 잤다. 3년 전부터 채식주의자라는 이분과 저녁 식사도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2013년부터 산티아고 순례를 해왔다면서 알베르게 스탬프가 찍힌 수첩을 세 개나 보여주었다. 지난 산티아고 순례 중 한국 사람들을 참 많이 봤다면서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왜 이렇게 먼 곳까지 많은 한국인이 오는지 물었다. 흠, 우리나라에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경험들이 책과 TV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종교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오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녀는 자신은 자기만의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싶어서 혼자 오기를 즐긴다고 했다. 나도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혼자 자유롭게 떠나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고 맞장구쳤다. 비슷한 연령대의 아줌마 의식은 독일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보다. 대접받는 식사를 푸짐하게 먹고 달리 할 것이 없으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새벽 어스름을 뚫고 독일 언니가 먼저 나섰다. 곧 뒤따랐지만, 키 큰 분은 빠르기도 하다. 안 보였다. 샛별도 머리 위에 하나 남았다. 찡하게 추운 짙은 파란 하늘빛 속에서 반짝인다.


  내가 걸어가는 곳으로 따라오며 점차 희미해져 가고 나무 하나 지나고 한 모롱이 돌아서고, “너도 사라지고...... 그렇지만 알아. 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넌 나에게 눈을 뗀 적이 없었지. 다만 햇빛에 눈이 부셔 알아보지 못한 것뿐. 내일 다시 만나~.”


  다시 바람이다.

손을 얼얼하게 할 만큼 차갑고 세차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은 출발 이어서일까?


 길에 나 혼자다.

  바람과 나뿐이다.

  나무와 나

  새들과 나

  내 그림자와 나

  나와 내가 대면하는 그 날인가 보다.

  그 사이에 바람이 끼어들었다.

  아무 생각도 구경도 못 할 만큼 센 놈이다.


  결국 고개 수그리고 또 발끝만 보며 바람을 거슬러 전진이다. 나와 대면하기 는 커녕 바람과 싸움질 시작. 나그네의 옷 벗기기 내기를 하던 해와 바람의 우화처럼 바람이 끈질기게 퍼부어댔다. 나그네처럼 모자를 날려먹지도 옷이 벗겨 지지도 않았다. 그날 밤 더 센 놈이 나타났다.


  호젓한 알베르게를 선택해서였을까. 나 혼자 묵게 되었다. 코골이도 없고 위층 침대에서 삐걱거림도 없고 아침에 짐 꾸릴 때 다른 이들을 깨울까 봐 조심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점이 훨씬 많은 셈인데, 슬슬 불길한 생각들이 몰려오는 것도 사실. 누군가 밤에 침입하는 일은 없겠지? 주인장은 괜찮겠지? 전등을 끄고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자다 깨다 잡다한 꿈을 꾸며 자다 새벽에야 불을 껐다. 아무 일 없이 아침 7시에 길을 나섰다.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며 배웅 나온 샛별에 인사하며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걸었다.


  지난밤 나는 내 안에 의심, 불안, 두려움이 공포의 괴물로 자라 어떤 확증할 만한 실체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고 스스로 피해자가 되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답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확률적으로 더 낮은 쪽에 한없이 기울어 과잉 방어하고 있었던 게 맞을 거다. 가끔 정확한 사실과 정보에 기반을 두기보다 믿고 싶은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훨씬 많았고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더 많았을 것이다.


  이것이 팩트다.

  결국, 오늘 성적은 1승 1패다.



  65세 스페인 할아버지 안드레, 나를 영어 공부 대상 삼아 말을 거신 듯. 퇴직 후 매일매일 홀리데이라며 이렇게 걷고 영어 공부하시며 소일하신다고. 뒤따라 오는 젊은 조카까지 불러들여 자꾸 내게 말을 걸게 부추기기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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