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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Jun 12.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33  달밤에

(몰리나세카에서 피에로스까지 25.1km)


  어제 한국 청년 한 명이 같은 숙소에 들어왔다. 요 며칠 사이 한국인과 거의 같은 숙소인 적도, 길에서 부딪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경북 경산에서 왔다는 젊은이는 아주 딴딴해 보였다. 하루에 3,40킬로미터씩 걷는다면서 한국 사람들과 몰려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저녁 먹으러 시내 중심 쪽으로 갔다가 타이스를 다시 만났다. 부르고스에서 헤어진 후 열흘도 더 지난 것 같다. 어찌나 반갑던지 서로 허그 인사까지 했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산티아고 카미노 후에 무엇을 할지가 화제에 올랐다. 타이스는 다시 일을 구할 거고 아마 베이커리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I don’t know’가 아니다) 난 이후에도 계속 여행 중일 거고 가을에 귀국하면 무엇을 할지 아직 모르겠다 고 했다.(이번엔 내가 ‘I don't know’) 살아 있는지 엽서라도 한 장 보내라기에 주소는 받아놨는데 사진을 한 장도 같이 안 찍고 헤어진 게 아쉽다. 앤서니 닮은 타이스의 하얀 얼굴이 벌겋게 익고 수염도 덥수룩해져서 앤서니 아저씨가 됐지만.


  Buen Camino! Theis♥


산이 높긴 높았던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이 끝도 없이 길고 바위 투성이라 종아리와 발끝에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엄청 아프다. 오래오래 주무르고 달래 주어도 쉽게 풀리지가 않는다. 그래도 숙소를 잡고 샤워하고, 빨래를 끝내고 꽃그늘 아래서 발만 일광욕시켜주니 행복감이 밀려온다. 행복이 큰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닌 것을 실감한다. 견딜 만한 노동 후 휴식이 주는 이 달콤한 충만감!


  이젠 찬바람이나 비가 길 위의 도전이 아니라, 부쩍 오른 열기다. 몇 주째 비가 내리지 않은 탓인지 오전 10시만 넘어가도 햇볕이 강력해져서 그늘 한 조각 없는 길을 걸을 때면 또 한 번 ‘내가 여기서 뭐 하나?’를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오늘따라 목적지 공립 알베르게가 아직 개장을 안 한 경우, 뒤로 돌아가 숙소 잡기는 억울하고 앞으로 갈 수밖에. 강렬한 해를 등 뒤에 두고 걸어도 눈부심은 여전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나니 좀 낫다. 다행히 문 닫은 곳에서 2킬로미터 전방에 알베르게가 오픈했다는 메모가 붙어 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일단 다시 길을 나선다. 모험이니까! 여태 그럭저럭 별일 없었으니까!


  2킬로미터, 30분 정도 가니 코딱지만 한 마을이 나타나고 알베르게 선전과 안내 간판이 보인다. 일단 하룻밤에 5유로로 가격이 착하다. 아담한 2층 집으로 오래됐지만 정성껏 관리해 온 작은 마당에 순례자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있다. 더위에 지친 내가 들어서자 스페인 주인장은 가방을 내려주고 마실 것부터 챙겨 준다. 보통 숙박료부터 내는 게 순서인데. 이분은 내가 잠시 숨 돌리고 쉬게 하면서 음료수부터 대접한다. 한참 신발까지 벗고 열이 식은 후에야 스탬프 찍고 숙박료 받고 방을 안내해준다. 갑자기 처음 만나게 된 객들과 주인이 집에 온 친구처럼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배려해주는 주인장은 처음이다. 물론, 다른 순례자들도 서로 오랜 친구처럼 살갑게 수다 떨고 즐거워 보였다. 모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주인장 조너선은 순례자들을 교회 뒷마당 언덕으로 데려갔다. 해발이 어느 정도 높아서인지 저 멀리 도시 야경 불빛이 찬란하고 하늘엔 보름달이 도시의 불빛보다 더 선명하게 밝았다. 저 보름달을 연인이 함께 본다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겠다 싶을 만큼 드라마틱했다. 삼삼오오 앉거나 풀밭에 벌렁 누워 달을 감상하며 시답잖게 달의 마력과 여자의 행동 패턴까지 미주알고주알 왁자하게 떠든다.


  캄캄한 밤에 눈부시게 빛나는 달을 보고 늑대인간을 상상하고, 악마나 마술사 가 보름달 밤에 일을 꾸미는 게 당연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달밤의 기억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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