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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Jun 10.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32  의식도 인식도 못 하는 죄까지

(폰세바돈에서 몰리나세카까지 20.4km)


  어제 철 십자가 1.5킬로미터 아래 폰세바돈에서 묵었던 건 신의 한 수였다. 해발 1480미터 높이 산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느껴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고, 내려놓을 죄의 짐과 소원을 지나는 길에 슬쩍 흘리듯 끝내고 싶진 않았다.


  오늘 아침 알베르게에서 가장 먼저 길을 나섰다. 생각보다 한참 걸어 올라가야 했다. 산 정상이 지평선이 되고 그 위로 퍼지는 햇빛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길었다.

서서히 눈앞에 다가오는 철 십자가는......


  높다랗고 갸름한 기둥 위에 얌전히 꽂혀 있는 작은 십자가였다. 기다란 기둥 아래엔 전 세계에서 모인 크고 작은 돌들의 무더기가 봉분처럼 받쳐주고 있었다. 엄청 커서 멀리서도 바로 보일 줄 알았는데, 예상을 빗나간다.


  우리나라 여느 대형 교회 십자가들만큼 크지 않았다. 너무 높이 세우지도 않았고 이름처럼 금속 느낌도 아니었다. 중세 교회가 권력이 되고 세계의 중심이었던 때 십자가는 신의 이름으로 전쟁마저 정당화한 살생의 무기였다. 크고 센 놈의 정의와 질서에 압도되어 내 안에 이미지와 개념이 왜곡돼 있나 보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준비한 작은 돌을 꺼내 돌무더기 위, 다른 돌들 사이에 미끄러져 내리지 않게 올려놓았다.


  고요한 가운데 기도.

그가 내게 ‘짐을 내려놔도 된다’고 다정히 말하는 듯했다. 더 이상 무거운 죄의 짐으로 어깨를 짓누르지 말고 내려놓고 가볍게 길을 가도 된다고.


  하나,

  둘,

  셋,

  ......


  여전히 의식도, 인식도 못 하는 죄까지

  작고 가냘픈 십자가 앞에 내려놓았다.


  왜소하고 볼품없다고 내 죄를 용서할 능력이 없진 않을 것이다. 금으로 치장한 황금 제단에 있는 신만이 구원의 능력자가 당연히 아닌 것처럼!


  일주일 만에 철 십자가 앞에서 다시 만난 구름 신령 캐나다 할아버지도 검고 작은 돌을 꺼내 올려놓는다. 두 달 동안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당연히 고국 캐나다에서 가져왔고 얼마나 만졌는지 만질만질해 보인다. 그분 소원은 무엇일까? 돌이 반짝일 정도로 염원하신.


  그렇게 하나둘 약속이나 한 듯 돌을 가져다 놓고 다시 카미노 길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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