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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Jun 07.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30 & 31 작은 돌에게

   (오스피탈데오르비고에서 무리아스까지 20.1km &

    무리아스에서 폰세바돈까지 22.6km)


  아침 7시 20분에 길을 나섰지만 중간에 지나 온 도시 아스트로가(Astroga)에 구경거리가 많아 사진을 찍다 보니 비교적 짧은 거리에도 오후 2시 30분이 다 돼서야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스트로가 숲을 지나면서 꼭대기 부분에 눈이 여전한 설산이 시선 끝에 보인다. 벌써 기세에 눌리는 듯했다. 저걸 넘는 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마을 끝이자 내일 걸을 코스의 시작점에 있는 알베르게에 묵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같은 곳에 묵었던 독일 할아버지 칼과 이탈리아 닭살 커플 알리사와 루카스가 벌써 와 있었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 식사를 모든 순례자와 함께 7시에 시작했다. 호박 수프, 리소토, 초콜릿 케이크, 페퍼민트 차까지 이 정도 코스 메뉴에 10유로다. 그동안 여행 경비를 아끼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너무 늦어 주로 슈퍼마켓에서 산 과일이나 스낵을 간단히 먹어왔다. 하지만 주방을 쓸 수 없거나 가게가 없는 경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마 순례 시작 후 처음으로 다른 순례자들과 모여서 하는 식사였던 것 같다. 식사하는 동안 각자의 여행을 응원하고 정보도 나누고 대화하면서 한 시간 가량 서너 가지 음식을 즐겼다. 여행하는 즐거움이 더해지는 시간이었다. 이탈리아 커플은 벌써 일곱 번째 순례 여행 중이라고 했다. 같은 코스가 아닌 서로 다른 코스로. 모두들 내일부터 오르게 될 해발 1480미터 산에 대해 한걱정들 내놓는다.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음식 서빙도 도맡아 해주는 알리사의 남편 루카스가 내일 도착할 곳 꼭대기에 철 십자가가 있고 그곳에 소원을 담은 자기만의 돌을 가져간다며 나에게 돌을 준비했냐고 물었다. “엉? 난 몰랐는데.”


  옆에 있던 독일 할아버지 칼은 벌써 자기 돌을 꺼내 든다. 하트 모양의 작은 돌. 그는 거기에 자신의 모든 죄를 버리고 오는 거라고 고요히 말했다.


  맛있는 스페인 가정식으로 저녁을 배불리 먹고 밖으로 나와 한참 만에야 삐죽 튀어나와 눈에 띈 얇은 하트 모양 돌을 찾았다. 내일 아침엔 나의 소원과 내버리고 갈 내 죄의 목록을 명상하는 걷기가 될 것 같다.


  아침 8시나 돼야 해가 다 떠오르기 때문에 그전에 멋진 햇빛 파노라마를 시시각각 즐길 수 있다. 번져오는 오렌지 빛과 물러가는 짙은 청색이 두 층으로 참 잘 어울린다. 자연의 빛과 색은 촌스럽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오늘의 화두를 막 시작하려는 차에 수다쟁이 63세 프랑스 여성 크리스틴이 나타났다.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탈리아인 남편과 이탈리아에 살면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강사이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많은 일을 하진 않는다 했다. 한국에 와본 적 있다면서 ‘고맙습니다’를 정확한 악센트로 말했다. 10여 킬로미터를 그녀와 수다 떨며 함께 동행했다. 점차 올라가는 언덕길이 숨이 차게도 할 만한데 얘기하느라 힘든 것도 잊어버렸나 보다.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고통마저 의식할 수 없다니. 의도적으로 뇌를 속일 수 있다는 게 사실인 것 같다. 결국, 의식과 인식의 문제라면 깨달음과 이해에 따라 고통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짊어진 죄와 고통을 모두 내려놓고 소원 하나 올려놓고 가는 길, 철 십자가의 산!


  2010년 나는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돌덩어리 같은 가책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쉬이 그 시간을 다시 맞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리고 소원 하나,

  작은 돌에 새겨 둔다.

  “감사합니다. 기회를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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