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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Jun 05.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29  Workaholic? Walkaholic?

(비르헨에서 오스피탈데오르비고까지 23km)


  스페인의 주거지나 주상건물들은 대체로 한 줄로 주욱 늘어서 있는 형태다. 어깨를 맞대든 지 등을 함께 붙이든지, 떨어져 있기보다 벽을 공유한다. 그러다 보니 건물이 상당히 큰 블록 전체로 이어지기도 한다. 혹, 건물이 떨어져 나간 경우엔 한 면이 일명 빨간 약이라고 하는 소독약을 발라 놓은 것처럼 노란 페인트가 진하게 칠해져 있다. 상처가 덧날까 봐 아주 많이 덧칠해 놓은 것처럼. 창과 창문이 거의 서로 마주 보일 만큼 건물 간격이 좁지만 상관치 않고 재산권 때문인지 집과 집 사이를 떨구어 놓는 우리 사정과는 많이 다르다.


  오늘은 고속도로 옆에 나란히 붙은 길을 끊임없이 가야 하는 날이었다. 규정 속도 이상으로 쌩쌩 달리는 물류 트럭들과 자동차들이 이른 새벽부터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엔진 소음이 위협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어제 레온시를 등 떠밀리듯 빠져나온 것도 아마 복잡한 도시, 시끄러운 소음, 도심에서 이방인 같은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해가 머리 위에 있을 때 길로 나온 건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지만 이젠 길 위에서 오는 피로감이 더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다. Workaholic(일중독)이 아니라 walkaholic(걷기 중독) 증상인가? 땀 흘리며 걷는 게 훨씬 맘 편하다니 걷기 3주가 지나면 순례자 유전자라도 생기는 건가?


  3일 만에 숲길이다. 숨통이 트이듯 마음이 환해진다.


  결코 피할 수 없는 길도 있다는 듯이 이틀 동안 고속도로 옆 작은 길 뿐이었다. 이제 다시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오는 초록 벌판이나 숲 사잇길이다. 더욱 감사하며 코를 벌름거려 깊은숨을 들이켠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호사를 맘껏 누린다. 한국은 요즘 미세먼지로 파란 하늘 구경하기가 손에 꼽을 정도라니. 맑은 하늘과 공기마저 잃어버리는 것인가.


  숲의 중간쯤에 다다르니 문득 가판대가 나타난다. 카미노 길까지 장사꾼이 진출했나 싶었는데, 그저 카미노 길이 좋아서 길 위에 살며 순례자들에게 과일, 음료수, 스낵과 쉼터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단다. 나는 덜컥 뭘 집어먹을 수가 없었다. 그의 선한 마음을 지레 의심한 게 찔려서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쉼터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중간에 멈춘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잠시 쉬면서 그네를 탔다. 이틀 전 같은 숙소에 묵었던 프랑스 여성 크리스틴이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봤다며 주로 기부를 받아 쉼터도 꾸미고 음식도 마련한다며 참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해준다. 마음이 시키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사는 자유로운 영혼 중 한 명인 듯하다.



  


  산·티·아·고· 배내 소리를 들은 듯

  낙인처럼 박힌 희미한 속삭임

  노매드의 운명처럼

  매일 첫길을 나선다


  미지의 길로

  어미의 자궁으로부터 반 바퀴를 돌아

  낯선 얼굴과 귀선 외국어가

  소음처럼 들리는

  무지의 길


  지도 밖의 땅을 향해 출항한

  콜럼버스처럼

  모험의 길


  각자 출발선이 달라도

  타고난 제 힘과 속도가 달라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노란 화살표가 샛별처럼 인도하는

  길을 찾아

  앞서간 이들의 흐린 발자취 더듬어

  거스를 수 없는 삶의 길

  산·티·아·고·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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