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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Jun 14.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34 나쁜 엄마, 나쁜 마누라

(피에로스에서 베가데발카르세까지 23.3km)


  눈앞 초록 풀밭 위에 갈색 말이 우아하게 걸어 다니고 앞산은 꽃으로 붉어져 가고 찰찰 거리는 계곡 물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흐르는 곳에서 쉬고 있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았다. 4월 초반을 넘어서자 스페인의 해는 더 길어지고 뜨거워진 듯하다. 3월에 바람이 방해꾼이었다면 이젠 직선으로 내리꽂는 햇빛 때문에 옷을 벗을 수 없을 정도다. 백색 유럽인들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해에 바짝 익은 얼굴로 알베르게에 들어오곤 한다.


  그나마 오늘은 깊은 산 사이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는 코스가 많아서 나무 그늘과 나란히 가기도 했다. 그래도 낮 12시가 넘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땀만 난다. 3월에 걷기 시작할 때 스페인은 대륙적 스케일의 느낌이었다면,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들어서자 산으로 둘러싸여 산마루의 테라스 같기도 하고 조각보 이불 같기도 한 다양한 밭들이 보였다. 마치 강원도 산중 어디를 걷고 있는 듯했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은 발을 담그고 잠깐 쉬어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런데 다리가 무조건 걷고 있다. 무슨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바로 그때 영국 코미디언 미스터 빈이 오버랩됐다. 큰 눈에 무표정한 얼굴의 미스터 빈이 노란 화살표를 따라 아무 데나 마구 가는 장면, 화살표가 개울을 가리키면 물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가고 건물 벽으로도 마구 걸어 올라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어제 하루 와이파이가 안 되는 숙소에서 자는 바람에 집에 연락을 전혀 하지 못했다.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을 남편 얼굴이 떠오르니 맘이 불편하다. 걱정할 게 분명한데. 방법이 없었다. 3월에 집 떠나기 전엔 ‘그럴 수 있다’에서 ‘용기가 대단하다’까지 이해했다가 실제 내가 없는 동안 본인에게 닥친 여러 상황들은 이론과 실제의 괴리만큼이나 감당하기가 만만찮은 게 분명해 보였다. 잘 지내던 딸한테도 잔소리할 일이 생기고, 휴가 나온 아들의 늦은 귀가에 신경 쓰여 잠을 설치고, 아파도 살펴주는 이 없이 집안 살림 도맡아야 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그 상황들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은근 기대하는 바도 있다.


  아빠로서 아이들과 직접 부딪쳐가며 이해하고 서로 맞춰 가는 기회의 시간 이기를, 크고 작은 집안일의 무한 반복 리필 도전, 가부장제의 우산 아래 누려 온 기득권의 실체를 날 것 그대로 느껴 보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서 23년 결혼 생활에 다시 우리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리셋까지 원한다면 너무 과한 걸까?


  올 한 해는 나쁜 엄마, 나쁜 마누라 노릇으로 지랄 총량의 법칙을 증명해 봐야겠다. 아무튼, 내가 집에 돌아갈 때쯤 그가 나를 위해 집 밥을 차려주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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