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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r 16.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1  투명인간 놀이    


   낮 12시를 넘어 인천공항 출발 후 파리 현지 시간으로 같은 날 오후 526분 도착! 8시간 차이니까 한국 현지는 자정이 돼가는 밤 1126분이었다. 구름 사이를 가르며 사뿐히 착륙 중.    


 이제 드디어 혼자다.

 집으로부터

 내 가족으로부터

 가장 멀리 와 있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이국이다.’


 과거로 거스르는 12시간 비행 후, 비 내리는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스피드와 사뭇 다른,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라도 하듯 공항 근처에서 파리 지하철 주변 풍경은 클래식하기도 하고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차가운 현대 도시 같은 느낌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직후 공항 리무진에 모자를 두고 내린 걸 알았다. 장시간 비행을 대비해 휴대용 목베개를 꺼내 기운차게 연신 불어댔지만 얼굴만 시뻘게지고 반응이 없어 들여다보니 속 주둥이가 막힌 불량품이었다. 장기 정지한 휴대폰은 챗심으로 교체하자 불통이 되어버렸다. 파리 도착 후 지하철 타기, 내려서 게스트하우스 찾기까지 하루가 정말 길었다. 입구 번호도 없는 지하철역에서 무작정 나와 밤거리에서 숙소 찾기는 정말 미로 속 실험쥐가 된 느낌이었다. 숙소 주소가 쓰인 종이를 들이밀자 구글 맵 화면을 직접 띄워주며 동네 지도를 보여주던 젊은 파리지엥(파리 남자)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헤맸을지. 낯선 도시에서 아찔한 시간들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젊은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 도움을 청했을 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 지도를 보여주는 반면에 파리지엔느(파리 여자)는 모두 모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파리 여행 팁 하나! 길을 묻거나 도움을 청할 땐 스마트한(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젊은 남자가 더 도움이 된다. 그들에게 난 아마 스마트폰 들고 그들이 띄워준 화면을 다시 찍는 커다란 백팩 멘 아시안 마담쯤?  
메르시 보(Merci beaucoup 감사합니다)!    


 물어물어 찾아간 한국인 민박 여성 전용 도미토리 2층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결국, 뒤척이다 일찍 일어나 아침 7시에 동네 산책에 나섰다. 숙소 오른쪽을 따라 쭉 걸었다. 이른 아침 공기가 서늘했다. 골목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주거지역인 듯했다. 역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서도 낡은 채 퇴색해 가는 건물부터 3층을 넘지 않는 현대식 아파트까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블록마다 차곡차곡 들어서 있었고 길가엔 아우디, 포르셰, 볼보, 폴크스바겐 등 외제 차들이-여기선 유럽연합국 차들-줄지어 서 있었다.

 오전 7시 전부터 문을 열고 준비했음직한 빵 가게들이 주택가 곳곳에 콕콕 박혀 있었다. 각자 자기 이름을 내걸고 그날그날 신선한 빵을 굽고 있었다. 우리나라엔 몇 개의 대기업 브랜드 빵집이 동네 빵집을 접수했는데. 이른 시간에 벌써 빵을 사러 나온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아주머니들은 무엇을 할까? 평소 이 시간이라면 나는 가족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을 텐데, 오늘은 이렇게 낯선 이국에서 한가롭게 동네 산책을 하고 있으니 참 이물스러웠다. 하지만 비밀의 벽장문이라도 열고 들어온 듯 순식간에 낯설고 새로운 세상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를 둘러싼 배경들과 사람들은 팽팽한 아침 기운 속에 바삐 움직이고 나는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어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순례 첫 출발지 생장피에드포트(Saint-Jeans-pied-de-Port)로 가기 위해 민박집을 나설 때 몽파르나스(Montparnasse) 기차역까지 동행이 있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젊은 20대 한국 여성이었는데 2주 동안 유럽 여행 중이라며 역 근처에 보부아르(Simone Beauvoir)와 샤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묘지를 보러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뻔했다. 프랑스 남부로 가는 기차역 몽파르나스 역 가까이에 수백 기의 무덤이 있는 공원묘지는 사람들의 주거지 한복판에 영화 세트장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마치 원래 무덤들이 있었고 그 둘레에 집이 하나둘 늘어난 것처럼 삶과 죽음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있었다. 체구가 자그마한 그녀는 일본어가 가득한 자신의 노트북을 들고서 두 작가의 묘를 찾았고 나는 같은 모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묘비들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원래 우리도 조상의 묘를 뒷산이나 동네 가까운 곳에 모셨지만 산업화 개발 바람을 타고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통에 죽음마저, 피붙이를 잃는 슬픔마저 자본과 생존의 논리에 팔아먹고 공동묘지를 혐오시설로 폄하하는 게 현실이다. 망자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일은 기념일에 행사처럼 치러지고 그 후손들은 그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희미한 기억뿐인 것 같다. 아무튼, 꽤 큰 공원묘지였다. 가부장제 남성주의와 법의 한계까지 훌쩍 넘어서서 세기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장 폴 샤르트르와 시몬느 보부와르의 무덤은 한 곳에 이름과 생애 연도만 표시된 채 소박하게 서 있었다. 

내가 죽은 후 묘비에 새겨질 말과 묘비 모양은 어떨까?” 하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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