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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r 18. 2018

길 위의 안식년

-Lost & Found

Day 2  괜찮아! 액땜이라 치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심 속 공원묘지를 구경하고 난 후 나의 첫 동행과 헤어져 몽파르나스 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미 몇 주 전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기차표를 예매해뒀기 때문에 종이 티켓으로 프린트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혹시’ 모르는 불안을 다 떨쳐낼 수는 없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신용카드와 예약 번호를 카운터 판매원에게 보여줬지만 신용카드에는 사용 내역이 없고, 알파벳 글자로 된 6자리 비밀번호만이 유효하다는 답변뿐이었다. 혼비백산 울상이 된 내 모습을 보고 다른 직원을 불러 사정을 전달해 보지만 인터넷 연결이 원활치 않아 스마트폰을 이용해 예약 확인 이메일도 보여줄 수 없었다.

  결국, 기차 시간은 목전까지 다가왔고 예약했던 기차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건지 더듬어 봤지만 억울하기만 했다. 티켓을 챙기지 않으려고 기차역 발매를 선택한 게 최대 실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쪽에서 그 어떤 구매 흔적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미스터리였다. 첫 일정부터 꼬이는 바람에 사기가 확 꺾였다. 대실망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멍 때리며 주변을 보니 다른 여행자들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자신들의 기차를 기다리면서 음식물을 먹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여느 역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나도 어느새 이미 놓친 기차를 빠르게 포기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지갑이나 여권을 도둑 맞거나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몸이 다치는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이건 단지 기차 티켓 하나 잃은 것뿐이야. 내 여행 전체가 망한 게 아니야. 그래. 운 좋게도 여행 전 액땜했다 치자. 여행에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가 없다면 그건 여행이라 할 수 없지’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아침에 동네 산책하면서 샀던 아기 주먹만 한 사과를 꺼내 물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오후 2시가 넘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까지 배고픈 것도 느끼지 못했던 거다. 인간의 의식과 인지가 몸의 생리현상까지 지배하는 순간들이었다. 내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처음 진심으로 토닥여주었던 것 같다. 그동안 나 스스로에게 참으로 인색하게 굴었다.

  다음 여정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여러 옵션에 대해 머리를 굴려 봤다. 순례 첫 출발지까지 당일 안에 도착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려서 파리에서 1박을 더 하고 다음 날 오전 출발하는 기차를 타든 지, 당일 오후 기차를 다시 타고 중간 지점에서 1박 한 뒤 거기서 생장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였다. 어차피 생장까지 기차가 연결되진 않기 때문에 중간에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버스 경유지 바욘(Bayonne)에서 1박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하기로 결정했고 오후 기차표를 샀다.

  프랑스 기차역 풍경은 좀 생소했다. 기차표엔 플랫폼 번호가 나와 있지 않고 출발 시간 임박해서 커다란 전광판에 플랫폼 번호가 뜨면 그때 사람들은 일제히 기차로 움직인다. 미리 각자의 플랫폼으로 가지 못하고 고개 쳐들고 자기 기차의 플랫폼이 표시될 때까지 전광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기다리다니 왠지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졌다. 어쩌면 여태 그래 왔던 패턴을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들만의 습관인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파리 몽파르나스 역을 떠나 프랑스 남부로, 서남부로 가는 기차 안은 쾌적하고 안락했다. 한바탕 소동과 멘붕을 겪고도 4시간여 가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남부로 종단하는 기차 밖 풍경은 목가적이고 평화로워 보였다. 잘 정리된 단아한 평원들은 지평선까지 이어지고 간간이 나타나는 마을들은 동화 속 한 페이지였다. 바욘(Bayonne) 기차역에서 내려 역 주변 숙소를 36유로에 잡았다. 공용 욕실이긴 했지만 가격 대비 쓸 만해 보였고 이미 어두워지고 있어서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얼른 잡았다. 하지만 난생처음 간 곳이라 2분 거리 호텔인데도 한참 걸려 찾아 들어갔다. 오늘도 첫날에 이어 긴 하루였다. 최소로 씻고 최소로 갈아입고 최소로 끼니를 때우면서 시차에 적응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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