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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Mar 20.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3  나무로부터     


   어제 새벽처럼 다시 새벽 세 시쯤 잠에서 깼다. 전날 밤 10시쯤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일까? 두세 번을 자다 깨다 반복했다. 잠이 쉬이 들지 않아 공책을 꺼냈다. 새벽 3시의 고요와 적막 속, 낯선 곳, 낯선 방, 낯선 침대 위에 혼자인 나. ‘이것인가?’ 내가 그렇게 갈망하고 욕망했던 것,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낯선 언어와 얼굴들이 철저히 이방인임을 느끼게 하는 환경이 나를 맘껏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조건인가? 오래 동안 익숙했던 집에서 낯설고 새로운 곳으로 급격하게 순간 이동한 탓에 내 의식과 감각은 현재 시공간의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 오랜 만이었다.

  

  여동생이 넣어 준 책, 《길 위에서 읽는 시》(김남희)를 반쯤 읽었다. “다 읽고 순례길 위 누군가에게 주어도 좋다.”고 했다. 도시 주거지에서 새벽을 깨우는 첫소리는 대부분 청소부들이다. 덜커덩거리며 쓰레기통을 밀고 탁탁 털어내고 하루하루를 재생하기 위한 첫 업무는 찌꺼기를 버리는 것부터다. 와이파이가 연결돼서 인터넷 뉴스를 보니 한국에선 오랜 숙변, 적폐, 박정희 신화와 그 이미지 정치의 화신 박근혜가 처리되어야 할, 버려야 할 ‘똥’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악취로 진동하던 세상이 새 아침을 열 듯 말끔하게 청소되길 빌었다.

  어제 아침 파리의 숙소 주변 산책처럼 오늘도 이른 아침 산책에 나섰다. 어젯밤 7시 30분이 넘어 도착한 바욘은 어둠 속에서 괴기스럽기도 하고 역 주변에 대한 선입견 탓인지 혼자 공포스러웠나 보다. 아침 밝은 빛에 보니 뼈다귀 귀신(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닭발 나무라 불렀던)같던 나무들은 햇살 속에서 독특하기까지 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셈, 괜히 웃음이 났다.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아 멋진 성당이 보이는 다리를 건넜다. 아마 기차역 주변이 구도심이고 이 다리 건너가 신도시쯤으로 보였다. 프랑스의 전통 건축양식이 살아 있으면서도 훨씬 널찍널찍한 길 사이로 큼직한 현대식 빌딩들이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시 청사처럼 보이는 건물 뒤로 고딕양식의 뾰족한 첨탑이 쌍둥이로 솟아 있었다. 거기까지 가서 들어가 보기엔 좀 멀어 보여서 포기하고 멀리서 사진만 한 장 찰칵!    

  전날 묵었던 파리 숙소에 충전기를 두고 온 바람에 호텔 쥔장에게 휴대폰을 살려달라고 엄살을 떨며 맡겼다. 떠나기 전까지 충전되기 바라며 호텔 음식을 샅샅이 뒤져봐도 밀가루가 안 들어간 메뉴는 찾을 수가 없었다.(소화불량이 심해서 밀가루를 최대 피하는 체질식 중이었다) 커다란 크루아상과 바게트, 살구잼, 버터, 요구르트, 오렌지 주스 거기에 카페오레까지 아침으로 먹는 프랑스인들 흥칫뽕!! 아쉬운 대로 쥔장의 친절에 보답하듯 카페오레를 시켰다. 설탕을 두 배로 넣고 한 모금씩 아껴아껴 마셨다. 빈속에 커피의 쓴맛이 짜르르 싸했다. ‘그래 이 맛이야. 행복한 맛!’


  단 몇 시간 만에 네이버 뉴스에 속보가 떴다. 우리나라 헌재 재판관 8인이 만장일치로 박근혜를 탄핵 판결했다는 소식이었다. 숙변을 본 것처럼 시원했다.

우리 국민의 위대한 승리였다!


  바욘 기차역으로 가니 커다란 배낭을 멘 외국인들과 함께, 몇몇 한국인도 눈에 띄었다. 나이 지긋한 남자 두 분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산티아고 순례지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 중 한 분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런저런 신상 정보와 순례 정보를 늘어 놓으셨다. 다른 한 분은 이미 경험하신 분이었고 이분은 친구 따라 이번에 처음 오신 거라면서 혼자 순례길 왔다는 내 말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셨다. 솔직히 지구 반대편 이곳 이 시간에 한국인과 맞닥뜨린 것이 꼭 반갑지만은 않았다.  

  생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탑승자들은 현지인들보다 세계 각국에서 온 배낭여행자들이 더 많아 보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프랑스 시골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길가에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과 세월을 저 자리에 서 있었던 걸까? 움직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장과 생명활동을 멈춘 적 없으리라. 신이 내게 정하신 계획이 있다면 아마 그저 ‘생겨난 그 자리에서 생명이 다하도록 성장하고 존재하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 나무처럼! 저 산처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 그 자체가 삶의 궁극이며 의미인 것을 이제야 깊이 호흡하듯 받아들였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존재하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산티아고 순례의 여러 코스 중 하나인 프랑스 북쪽 길 800킬로미터 루트의 시작점 생장피에드포트 순례자 사무실은 가장 높은 언덕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걷다 보니 버스를 함께 타고 온 다른 순례자들과 멀어졌다. 길을 정확히 모를 땐 무리를 벗어나면 안 되는데, 결국 뱅뱅 돌다 문 닫기 직전에 사무실에 도착해 순례자 수첩과 간단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순례자 사무실 근처 알베르게(순례자 숙박시설)에 일단 짐을 풀었다. 알베르게 관리인은 보통 순례 경험자들 중 자원봉사를 하는 마음으로 지킴이를 한다고 들었다. 첫 알베르게의 지킴이는 올해 나이 70이 넘으신 프랑스인 퇴직 할아버지였다. 눈매 서글서글한 할아버지는 “매년 한국 순례자 수가 3천 명 정도 된다.”고 하시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이렇게 먼 곳까지 오는 게 신기하고 흥미롭다고 하셨다. 이런 의문은 순례 이후 내내 만나는 이마다 물어보는 단골 질문이었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받은 기다란 스탬프 수첩(매일 숙박하는 알베르게에서 받는 도장 수첩)과 매일매일 걷게 될 코스의 길이와 해발, 숙박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프랑스 길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처음 받는 텍스트 자료였다.


  드디어 다음 날부터 순례길 시작이었다. 첫날 28킬로미터, 막바지에 해발 1400미터 이상의 산을 넘어가는 가장 길고 가장 험난한 코스라고들 했다. 생초보인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중간에 멈출 수 있는 숙소는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3월 초순인데도 눈 때문에 피레네 산맥은 통제되었고 우회로를 따라가야 하는 코스임에도 만만찮아 보였다.     


  순례 시작 전날의 설렘과 흥분, 게다가 남녀 혼숙에 수십 명이 한 방에서 자야 하는 도미토리에서 잠들기는 불가능했다. 전 세계에서 엄청난 코골이들이 몰려왔나 보다. 결국, 한두 시간 만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한 채 김남희의 책을 폈다. 그녀는 사람들이 떠나간 집은 끝내 무너지고 쇄락하고 만다면서 “집은 사람의 온기를 먹고 사는가?”라고 물었다. 어제 바욘에서 본 오래되고 낡아 퇴색해 가던 몇 백 년 된 건물들(사람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다)이 오버랩됐다.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낸 옛집에 사람들이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공생하고 있었다. 시간을 가로질러 더불어 상생해 온 것이다. 씨줄과 날줄이 엮이듯 시간과 공간을 교직하는 살아 숨 쉬는 건물 또한 인간처럼 따뜻한 생명체인 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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