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H Choi Jun 27.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39  카르페디엠!

(팔라스델레이에서 리바디소다바익소까지 26.1km)


  어제에 이어 새벽 별도 달도 배웅해주지 않는 구름 낀 날이다. 게다가 안개까지 자욱하다. 해는 더더욱 늑장이고. 산티아고 입성이 이틀 앞이다.


  부활절 미사에 맞춰 가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더욱 빨라졌다. 내일 일요일까지 67킬로미터를 오늘내일 이틀에 가자니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이제야 길 걷는 맛을 제대로 터득한 것 같은데 나도 이틀 후 도착이라니. 더욱 여유를 부리고 싶어졌다. 더 자주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시야 멀리 안개 자욱한 숲과 흐린 하늘을 담고 싶었다. 걸어온 지 한 달 이상의 날들 중 안개 낀 날까지 다양했다.


  어제는 미스트 같은 안개비 속을 걸었다. 뜨거운 열기보다 걷기에 훨씬 좋았다. 게다가 헬리랑 손짓 발짓, 영어 반 스페인어 반 대화도 재미있었다. 키 크면 싱겁다는 우리말 속담이 생각나게 하는 그런 캐릭터였지만 마음만은 얼마나 순한지 느껴졌다. 사실 반 짐작 반의 불분명한 대화를 이어가는 듯했지만 우린 참 많이 웃었다. 걷기 이틀째인 그녀는 35일 차인 나에게 “crazy”라 외쳤다. 엉성한 자기 영어를 탓하면서도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 개그 수준이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카미노 친구들만이 가능한 무한 연대의식! 언어도 나이도 성별도 그 무엇도 장벽이 될 수 없는 순례자의 길.

신이 우리에게 심어준 그의 마음인 것 같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파란 하늘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어느 지점을 넘어서자 안개가 걷혔다. 살아가는 동안 어디 선가 어느 땐가 안개가 끼듯 앞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안개는 계속되지 않으며 어느 시점에서 끝나는 것도 사실이다.


  어제 날이 종일 흐려서 양말이 마르지 않아 배낭에 걸고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스페인 할머니 둘이 뒤에서 엄청 웃었다. 내친김에 그냥 뒷모습을 사진 찍어달라고 하자 흔쾌히 찍어주면서 ‘부엔 카미노’를 외쳐 주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40여 킬로미터가 되자 유칼립투스 숲이 나타났다. 키 큰 나무 숲에서 강력한 향기가 진동한다. 코를 벌름거려 숨을 깊이 들이쉰다. 코알라가 된 듯 입맛도 다셔보고.


  산티아고 도착이 가까워오자 부딪치는 얼굴들이 낯익었다. 어느 땐가 어느 곳에서 스쳐 지나갔거나 한 번 이상 같은 숙소에 머물었던 인연들이다. 오래 봐 온 친구처럼 얘기가 시작되고 함께 걷기도 한다. 폰프라다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던 빨간 얼굴의 잉글리시 맨 저스틴은 가방에 긴 우산을 꽂고 다녀서 더욱 기억이 난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의 동의를 얻어 42일째 걷는 중이라고. 내 얘기에 그는 “awsome(굉장해)”이라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가 시답잖은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되묻기도 하면서 동행해 준 덕분에 계획보다 3킬로미터를 더 왔다. 오르락내리락 언덕을 반복하다가 동화 속에나 나올 만한 예쁜 마을에 머물기로 결정.


  저스틴도 나도 월요일, 이틀 후에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이다. 그는 완주보다 걷는 과정 그 자체에서 더 강력한 경험들을 했다고 말했다. 하루하루 단순한 걷기를 통해 느끼고 깨닫고 얻는 것들은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매우 사적이겠지만, 편안하고 자신감이 묻어나는 그의 표정을 보니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 건강한 정신력이 충전되고 단순한 생활 패턴으로 강한 체력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완주는 덤으로 얻을 뿐.


  어쩌면 건강하고 행복한 삶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배낭의 무게가 정해져 있듯 하루 감당할 몫만 넘지 않는다면, 하루 이상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필요를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오늘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




작가의 이전글 길 위의 안식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