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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Jul 05.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40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오페드루소에서 산티아고까지 20km)


  오늘은 새벽 5시도 되지 않아 순례자들이 길 떠날 채비로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매일 낮 12시 순례자들을 위해 열리는 향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 나서려는 거다. 어제 부활절에 산티아고 입성을 못 맞췄으니 오늘 미사는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런데 20킬로미터 앞둔 지점에선 적어도 5시간이 걸리고 늦어도 7시 전에 나서야 한다. 문제는 8시나 돼야 해가 밝아지기 때문에 한 시간 이상 어둠 속을 혼자 가야 한다는 것. 흠...... 동행자가 있으면 딱인데. 아무리 눈치를 봐도 낄 만한 그룹이 없어 보였다. 시간만 흘러 보낼 수 없어서 일단 길을 나섰다. 50미터도 가지 않아 길을 서성이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젊은 여성 네 명을 만났다. 우선 길을 앞서 안내하면서 동행하기 시작했다. 매우 자연스럽게 여자 다섯이 깜깜한 유칼립투스 숲을 전등을 비춰가며 걸어 나갔다. 갈라진 길에서는 방향 표시를 함께 찾아가며.


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혼자서는 못 해도 함께 하면 가능함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뒤에서 비추는 플래시는 우리 그림자를 유칼립투스 나무만큼 크게 만들었다. 넘실넘실 춤추듯 걸어가는 다섯 거인들. 오늘따라 내게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났는지 걷기 시작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2시간 이상 걸으며 화장실도 가지 않고, 아침으로 겨우 시리얼 바를 먹고 4시간 30분 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이건 내 힘으로 걷고 있는 게 아님을 확실히 느꼈다.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 주기라도 하듯, 앞에서 끌어주기라도 하듯 자석에 이끌리어 가듯 발이 척척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38일 800킬로미터를 완성하는 순간이 오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감사와 감격이 격하게 울컥거리는 걸 꾹꾹 눌렀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또 망신이다. 하지만 성당으로 바삐 행진하는 순례자들 얼굴에선 이미 감격과 뿌듯함, 기쁨, 열기마저 보였고 성당 바로 옆,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집시 앞에서 최고조가 되어 덩실덩실 춤까지 추는 이도 있었다. 네 명의 나이 든 여성 순례자들은 하이파이브를 번갈아 가며 해대고 성당 앞 광장에선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사진도 찍고 널브러져서 하염없이 고고한 성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티·아·고· 

  나를 설레게 한 이국의 땅

  수천, 수만, 수백만의 걸음을 모아 온 곳  

  흩어져 있는

  전 세계의 순례자들을

  한 빛으로 모이게 한 대륙의 서편 끝자락

  당신의 큰 뜻이 별처럼 빛나는

  산티아고의 서쪽 하늘


  잠 못 드는 밤이 될 것 같았다.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그냥 좋아서. 순례길 초반 함께 했던 미스터 최** 는 산티아고 입성 날 기쁨과 함께 허무함도 느꼈다는데, 난 그저 웃음만 번졌다. 낯선 도시에 이방인으로 부유하듯 두리번거리는 것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


  내일 무엇을 할지, 

  산티아고 완주 후 다음 여정이 어찌 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냥 기분 좋은 날이다.


  수백 년 된 신학교를 순례자 숙소로 사용하는 역사적 건물에서 하루 묵었다. 복도 같은 홀에 침대를 죽 늘어놓은 모양이 마치 야전침대가 늘어선 병실 같지만 정원과 건물은 참으로 고풍스러움 그 자체다. 언덕에 위치한 덕에 산티아고 시내와 멀리 대성당 첨탑이 보였다. 나처럼 잠 못 드는 젊은 순례자들이 마당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수다 중이었다.


  조금 전 해질 녘 캐나다 퀘벡에서 날아오신 70세의 은퇴 여성을 만났다. 70세에 두 번째 순례 중이라면서 내년엔 1000킬로미터 정도의 로마 길을 15세 손자랑 걸을 계획이라고 한껏 들떠서 말씀하시는데 너무나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 나이에도 몇 백 킬로미터 걸을 계획을 세우고 도전하려는 행복한 노년의 모습을 보았다. 카미노의 경험이 반복될수록 업그레이드되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다. 그분도 땅끝 피스테라(Fisterra)에 가신다고 했다. 90여 킬로미터니까 3,4일이면 가능하다고.


  대서양까지 걸어 가보기로 나도 마음을 정했다. 6개월 계획한 여행 중 한 달 반이 지나간다. 남은 기간도 낯선 곳에서 부유하듯 이방인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이국의 공기와 풍경과 삶 속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고 집중할 것이다.


* 프랑스 800킬로미터 순례길 완주율은 전체 12%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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