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안식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축구장 &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어제 한인 민박으로 옮겨 6박을 머물기로 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매일 잘 곳을 물색하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한인 민박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 알던 사이도 아닌데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공통점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편해진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질감을 찾아내고 안전, 안정감을 느끼나 보다.
오늘은 마치 이곳 현지인처럼 전철을 타고 복잡한 환승도 했다. 우리나라 전철처럼 긴 환승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미로처럼 알쏭달쏭하다. 전철 안에서 기타나 아코디언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거리의 아티스트들 또는 구걸하는 이들까지 크게 낯설지 않았다. 전철을 타고 내릴 때, 승객이 알아서 문에 붙은 노란 스위치를 눌러야 문이 열린다는 것만 빼곤 거의 같은 시스템이다.
오늘 첫 타깃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eu) 축구장!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유럽의 축구 천재들이 뛰는 세계적 규모의 축구 경기장이라니. 국내외 주요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보기만 했지 축구의 ‘축’도 모르던 내가 지난 5년간 동네 여성축구팀에서 직접 운동하면서부터 축구 팬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건강과 여가를 위해 시작한 축구가 그렇게 매력적이고 중독적인 재미가 있는 줄 몰랐다. 여전히 나의 ‘개’ 발 패스와 슈팅은 그다지 진전이 없지만 운동장에서 11명이 한 몸처럼 느끼면서 뛰어야 하는 감동의 스포츠다. 그런데 게임 관람도 아닌 경기장 구경에만 3만 원 정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니. 결국 경기장 밖에서 주먹을 불끈 쥔 파이팅! 인증숏만 찍고 돌아섰다. 내일 발렌시아 팀과 레알 마드리드 게임이 있다는데. 입장료가 100유로 이상이고 이미 표는 매진이라고. 민박집에 같이 묵었던 청년 하나는 이 게임을 보러 마드리드에 왔다면서 기어코 현장 구매를 해서 관람했다나.
마드리드 시내 가까이 프라도 미술관 건너편에 티센 보르네미사(Thyssen Bornemisza) 미술관에 왔다. 16세기 이후 유럽 국가별로 나누어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림이 내게 말을 걸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감상 중이다. 한 시간쯤 지나니까 배도 고프고 졸리다.
입장료 12유로, 다 봐야 한다!
3층부터 시작해서(스페인에서 1층은 0층, 2층은 1층 이런 식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감상한다. 현대미술까지 그림의 역사를 주욱 따라갈 수 있도록 전시했다. 15,6세기 고딕, 바로크 스타일 유화부터 유럽 여러 나라 화가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역시나 그 시대 주요 소재는 성경 이야기,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이 주요 그림의 소재이자 주제다. 사진을 찍은 듯 붓의 터치가 섬세하고 빛의 명암은 착각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빛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캔버스 위에 물감의 농도로 정확히 그려낸 붓의 터치도 놀랍지만 리얼한 재현주의가 당시엔 예술적 기준이고 주류였던 것 같다. 주류 기독교의 소재와 주제는 공통이었지만 화풍은 나라와 화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내 마음에 드는 건 이탈리아 베네치아 예술가들의 그림이었다. 성경과 왕가, 상류층 그림 소재에서 점차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현장들이 인상파, 입체파, 야수파들에 의해 개성적으로 그려졌다. 미술시간에 들었던 무슨 무슨 파, 파, 파들과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핸드폰 카메라가 손마다 들린 현대에 예술이 원하는 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극대화되고 동시에 특별함과 다양한 파격이 존중받는 방향일 것 같다.
내게 살짝 인상적이었던 그림들 위주로 사진을 찍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 좀 알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색감과 구도, 소재, 주제, 질감들. 또 다른 영역, 미술관 순례에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들이었다. 내일과 모레도 두 개의 미술관 관람을 계획 중이다. 모든 그림을 다 감상할 순 없고 주요 포인트만 찍어서 보는 전략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