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안식년
일요일 아침은 여기 스페인에서도 한산하다. 조용한 아파트촌을 나와 전철을 탔다. 전철 안에도 사람이 드물다. 환승 후 갈아탄 전철 안에 인디오로 보이는 3명의 남자가 사이먼과 가펑클의 인기곡들을 연주한다. 낯선 나라에 온 일인 여행자를 위해 이보다 좋은 위로가 있을까. 좋다.
톨레도!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중세의 도시!
영화 세트장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도시 전체가 중세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500년대 이 도시가 왜 수도로 정해졌는지 토하(Toja) 강을 따라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보면 무릎을 칠 것이다. 도시를 유자 형으로 둘러싸서 흐르는 강과 가파른 절벽 위에 요새처럼 자리하고 있어서 쉽게 함락될 곳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건 어딜 가나 한국 단체여행자들이 있다는 것. 그 어느 때보다 긴 5월의 황금연휴를 놓칠 리 없다. 순례길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인사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관광지에서는 마치 제주도에서 서울 사람 만난 정도의 느낌이었다.
작고 귀여운 소코트렌(Zocotren)이라는 기차를 타고 도시 외곽을 따라 돌았다. 높은 언덕까지 힘들이지 않고 올라가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꼭 가보고 싶은 몇 곳만 찍어서 가는 건 미술관이나 여기서나 마찬가지일 듯.
성당 들어가기 전 성당 앞 식당에 들러 나에게 근사한 식사를 선사하기로 한다. 무려 15유로에 ‘오늘의 메뉴’를 먹었다. 여행 중 그다지 음식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에너지 공급원 정도로만 먹어왔는데 스페인은 세계적인 미식 국가가 아닌가. 세계에서 바가 가장 많은 나라고 음식의 종류도 세계적으로 많다. 와인, 비어, 스낵, 빵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우아하게 식사하고 나오니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티켓 사는 줄이 20여 미터로 늘어서 있었다. 하루 여행으로 나왔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줄이야. 마드리드도 다음 날 노동자의 날(5/1)까지 황금연휴 기간이라서 그렇단다. 그런데 줄 서는 과정에서 재미난 해프닝이 벌어졌다. 티켓 사는 줄이 너무 길다 보니 내 앞에서 기다리다 포기하고 가버리는 사람이 생겼다. 금세 어떤 스페인 아주머니 한 분이 그 자리로 끼어들었고 내 뒤에 있던 다른 스페인 사람들이 급기야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아까 이 사람이 네 앞에 있었냐?”라고 물어보는 눈치다.
대충 감이 그랬다. 음, 주춤거리다 아닌 것 같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스페인 분들 거봐라 하듯이 다시 한번 항의하지만 끼어든 그 아주머니는 당당히 서 계신다. 결국 티켓 창구 가까이에서 관리자에게 일러바친다. 관리인이 다시 한번 확인하자 그 아주머니 역시 아니라고 대답이 간단하다. 뒤에 서있던 분들, 구시렁구시렁하며 째려보기만 한다. 사람 사는 데 일어나는 상황들은 우리나라 나 스페인이나 거기서 거기다.
톨레도 대성당은 스페인 가톨릭의 대본부라는 말 그대로 웅장, 거대, 화려하면서도 중후함이 있었다. 그 안에 그림만으로도 다른 성당과 확연히 다른 급이었다. 역시 눈에 띄는 것은 엘 그레코의 그림들이었다. 그레코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였다가 쫓겨나 살게 된 곳이 톨레도였다고 한다. 그레코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원래 그리스인이었는데 스페인에 살면서 궁정화가로 명성을 쌓고 톨레도가 좋아 말년까지 여기서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가 살던 시대 화풍에 갇히지 않고 한 시대를 앞선 천재성이 느껴진다. 스페인 3대 화가 중 한 명인 엘 그레코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톨레도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가 왜 그렇게 톨레도를 사랑했는지 톨레도에 와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톨레도라는 어원은 로마인들이 툴레툼(Toletvm:참고 견디며 항복하지 않는다)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파노라마 뷰를 볼 수 있는 언덕에 서면 결코 침략당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도시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고 그 안에 옹기종기 다닥다닥 골목골목 삶의 본거지들이 한 덩어리로 잘 짜 맞춘 거대한 레고 도시 같기도 하다. 실제 그 당시 톨레도엔 가톨릭 신자들과 유대교인들, 이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도시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대청소하듯 유대교인들을 몰아내고 이슬람들과 전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정권을 탈환하고 강력한 왕권 또는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는 중세의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한 것 같지도 않다. 시간이 역사가 될 만큼 흘러도 사람 사는 데 일어나는 상황들은 거기서 거긴 가 보다.
엘 그레코를 기억하며 비 내리는 톨레도를 떠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