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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Apr 01. 2018

길 위의 안식년

-Sabbatical Year on the road.

Day 7 Lost in Pamplona

                                          (수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19.3km)
  

  늦은 오후에 마신 커피 반 잔 때문에 지난 밤새 눈만 감고 가수면 상태로 있다가 일찍 일어났다. 어차피 안 오는 잠. 오늘 열심히 걷고 나면 잘 자겠지 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팜플로나까지 19.3킬로미터 여정이다.

  어젯밤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들처럼 나도 다음 도착할 숙소로 배낭을 배달하는 동키(donkey)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진정한 순례자 모드가 아니라 서울대공원 길 산책 나가는 순례자 놀이다!’ 이틀 동안 내린 비가 그치고 날씨도 완벽했다. 바람도 햇빛도 온도도 적당해서 좋았다. 이런 호사라니...... 순례자 양심이 계속해서 자기 검열을 했지만 무거운 배낭이 없어 날아갈 듯 걸음도 빨라졌다. 게다가 지난 3일 동안 이미 해발이 높아지던 터라 계속해서 완만하게 평지에서 분지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이틀 동안 내린 비로 불어난 아르가 강물이 계곡을 따라 시원하고 세차게 흘렀다. 강 옆 좁은 길은 딱 한 명이 걷기 좋은 폭이었다. 빠르고 세찼다가 느리고 잔잔히 흐르는 계곡물은 새소리, 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자연이 연주하는 완전한 앙상블이었다.


  가벼워진 배낭만큼 소풍 나온 기분으로 길가에 핀 꽃들에게, 자기가 놀라 사사삭 풀 속으로 사라지는 도마뱀에게도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 보았다.
‘주인이 오지 않는 걸 알기나 할까?’ 싶은 집에 두고 온 강아지 ‘동그리’를 닮은 표정의 말도 한 컷. 마당 한구석에서 미동도 안 하고 지나가는 사람의 움직임을 눈으로만 따라가는 개들에게도 이른 아침 길에 나타난 이방인이 낯설지 않은 눈치였다.


  모든 것이 걷기에 완벽했다.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려오는 발가락만 빼고.
험난했던 초반 코스를 겪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거다. 자기 한계치의 최대와 최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참 모호하다. 하지만 경험들을 통해 상대화 하면서 순서 정도 아는 데 그치는 것 같다. 결국 다양한 상황들에 부닥치고 당하면서 자신의 임계점을 알아가는 것 아닐까. 이 나이에도 발끈해지거나 허둥대거나 그런 반응들이 여전한 걸 보면 끝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8킬로미터를 앞둔 지점에서 어제 전기포트에 삶은 달걀을 점심으로 먹으려고 껍질을 깼다. 껍질이 표면에 딱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노란 노른자가 꿀처럼 흘러나오는 고소한 맛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달걀 반숙! 이른 아침부터 소풍 나오듯이 10킬로미터를 넘게 걸은 후 맛본 음식 맛이 최고의 맛으로 기억에 각인될까? 사과 한 알, 달걀 두 개. 소박하지만 그래서 감사한 맛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푸른 목초지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몇 마리의 말과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가축으로서 식용이 될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 자유는 중요하다? 인간을 위해? 안전한 먹을거리로서 뿐만 아니라 동물권 관점에서도 점차 이슈화되는 요즘, 진지하게 고민할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푸른 초원 위에 점점이 풀을 뜯는 풍경은 평화 그 자체였다. 강을 따라 조깅하는 이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들떴다.


팜플로나(Pamplona) 입성!!!


  줄곧 시골 마을 산길과 들길을 노란 조개를 쫓아 걷다가 인구 20만의 대도시 안으로 들어가니 어리둥절 정신줄을 놓았는지, 오늘 묵을 알베르게를 못 찾고 길을 잃고 말았다. 정신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 차들, 사람들, 오토바이 탄 사람들, 자전거 탄 사람들까지 어리둥절하게 했다. 반경 1킬로미터쯤 안에서 두 시간을 뱅글뱅글 돌면서도 숙소를 찾지 못했다.

  너무나 자신 있게 방향을 가르쳐주는 스페인 노신사한테 속았다. 엉뚱한 데로 빠져버렸으니. 그래도 다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 그림까지 그려가며 알려주었다. 누군가들은 구글 지도 보고 찾아가는데 난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찾아갔다. 사람을 믿겠다며 별 준비 없이 떠나오더니...... 완전 국제 미아 신세였다. 미리 도착한 순례 동행자랑 연락도 원활치 않아 투우 경기장 앞 벤치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결국 뱅뱅 돌던 지점이 좁아지면서 건물 2층에 위치한 헤밍웨이 호스텔을 찾아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지난 숙소에서 오늘 묵을 숙소까지 짐 부치는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고 가볍게 소풍 나오듯 신나게(좀 찔리면서) 20여 킬로미터를 걸어왔는데, 가방 배달 사고가 났다. 헐! 간신히 찾아간 숙소 관리자가 친절하게도 전 숙소로 전화해주었다. 엉뚱한 곳에 가져다 놨단다. 우이씨! 진정한 순례자가 아닌 순례자 놀이하다가 된통 걸린 건가? 아무튼 이차저차 여차 저차 해서 가방도 돌아왔다. 역시 대도시는 정신을 쏙 빼놓는다. 산과 초지, 강, 숲에서 가지런히 추스른 맘을 차, 오토바이, 공사 소음들로 한방에 훅 날려버렸다.


  날마다 새로운 경험과 느낌들이다. 모든 것이 정해진 각본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디테일도 같지 않고 반전도 예상 밖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내게 주는 깜짝 선물 같은 순간순간이다. 물론 배달시킨 가방이 엉뚱한 숙소에 가버린 아찔한 사고도 있었고 예약한 숙소 문 앞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두 시간 동안 낯선 이국땅에서 미아가 돼버리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엔 모두 힘 빠지고 추억만 오롯이 남을 것을 이젠 안다. 저녁 7시에도 스페인의 해는 여전히 뜨겁고(3월 중순 현재 섭씨 20도) 여전히 환했다. 현지인들이 저녁식사를 9시 이후에 하는 건 당연한지도.


  비록 팜플로나는 내 정신줄을 쏙 빼놓고 길을 헤매게 만들었지만 로마 시대부터 지켜온 요새 같은 성채 내부 골목들 사이사이를 거닐 땐 어두운 미로에 빠진 듯 짜릿한 모험 같았다. 중세 이전부터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 터전으로 현대인들의 삶을 이어주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그렇지만 난 느리면서도 변함없이 한결같은 자연과 어우러진 시골 동네가 마음이 편하다. 오래오래 머물고 싶을 만큼.


  순례 시작 후 매일매일 잘 곳은 바로 전날 숙소에서 호텔 예약 앱과 알베르게 리스트를 참고해서 선택했다. 팜플로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머물면서 소설 《The Sun also rises》를 썼고 그로 인해 6월 한 주 동안 소몰이 축제가 열리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헤밍웨이 거리의 헤밍웨이 호스텔을 선택하기도 했던 건데 한낱 얼뜨기 순례자인 내겐 ‘Lost in Pamplona’의 추억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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