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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아 Jun 27. 2024

상실, 남아있는 고통에 대하여#02

 현실의 자각이 시작되었다.

02. 현실의 자각이 시작되었다.



지금 시우의 빈 방,
빈자리만이
마치 거짓말처럼 이곳에 있다.



7월 초, 한여름을 향해가는 나른한 더위, 버스정류장 앞에 나란히 앉아 채소를 파는 좌판의 할머니들, 시우도 종종 사 먹던 치킨집에서 닭이 튀겨지는 익숙한 냄새, 아파트 경비 초소에 앉아 계신 경비아저씨, 동네를 어슬렁대는 몇 마리 고양이들의 모습까지 일주일 전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느리고 고요했다. 살아있는 지옥을 경험한 지난 일주일만큼 눈에 들어익숙한 평화로움 또한 비현실적이었다.


시우의 새 자전거가 현관 앞에 서 있었고 우리 집은 우리가 떠나던 그날과 같았다.

현관문을 여니 집안의 공기까지도 모두 그대로였다.


타국에서의 막막한 두려움이 걷히고 막상 집에 돌아오니 실체가 있는 현실의 공포와 마주하게 되었다.

겪고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난 곳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만을 바랐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 설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육체와 정신이 쪼개진다.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도 함께하고 싶지도 않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무감각에서 서서히 풀려나면서 나는 점점 비탄에 빠진다. 오직 시우만 생각할 수 있는 나만의 동굴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게 나는 '괜찮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감정이 상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땐 괜찮다는 말이 나올 수 있었나 보다...

내가 스스로 시우의 빈 방을, 아이의 부재를 인지하게 되는 그 순간이 오니 비로소 통곡할 수 있었다.

인지와 감정이 만나는 순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할까 봐 정신세계는 방어 기제를 발휘하고 스스로 차단막을 만들어 쏟아질 감정을 붙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눈물이 봇물처럼, 통곡이 메아리처럼

순식간에 나를 뚫고 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명료하게, 아이가 보고 싶어 미치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평생 동안 수천수만의 추억이 순간순간 곳곳에서 예고 없이 고개를 쳐들며 나를 향해 비수처럼 다가올 것을 짐작한다.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 불멸의 고통이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그 고통 속에서도 먹고 자고 때로 웃고 울며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예전과 똑같이 먹을 수 있고 잘 수 있고 웃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이 과연 맞는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그런 나를 스스로 비난하면서...



 

한비가 방학 동안 외할머니, 이모, 사촌 동생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해친정에 몇 주간 머무르기로 했다.

친정집에서 내 요동치는 감정은 잠시 깊이 은신했지만 정말로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다는 건 너무 답답하고 힘든 일이었다. 우리 집에서, 시우방에서 실컷 울고 싶었다. 차마 친정 엄마 앞에서 통곡할 수는 없었다.

잠깐씩 엄마가 외출한 사이나 그래도 참을 수 없을 땐 욕실에서 샤워기를 붙들고 울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잃은 딸을 바라보는 가슴 찢어지는 또 한 사람, 나의 엄마.


결국 나는 한비는 남겨두고 남편과 가족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있는 남편을 핑계 삼았지만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 집에 오는 걸 선택한 것이다.


집에 돌아와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었다.

애도, 심리학, 가족을 잃은 슬픔을 위로하는 책, 자서전, 기독교 서적등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시간은 멈춰 버렸고 나는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 견딜 수 없어서 뭐든 해야 했고 어떻게든 출구를 찾고 싶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눈물도 흘리고 공감도 했지만 어떤 것도 우리 시우를 잃은 슬픔과 비교할 수 없었다. 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주일 예배 외엔 거의 가지 않던 교회를 찾았다. 금요예배에 가서 실컷 울었다.

'나'인 거냐고 따질 수 있는 유일한 한분, 그분을 향해 목놓아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니 그래도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엄마한테 고모가 남은 시간 약 2년이라는 간암과 대장암 말기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모는 이혼 후 자기 자식은 못 챙겼지만 첫 조카인 나를 지금까지도 살뜰히 챙기며 잘 해준 사람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 비보가 너무 슬프다거나 고모가 참 불쌍하다는 연민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60년을 살았고 앞으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니 얼마나 큰 축복이며 행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 순간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인과 세상을 향해 냉담해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귀여운 아이를 보아도 이웃을 만나도 나는 웃어지지 않았다.

내 안에 존재하던 솜털처럼 따뜻한 것들, 작은 친절함 같은 것들이 사라짐을 느꼈다.



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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