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01. 한 우주가 사라졌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시간만이 흐른다.
나의 세계가 멈추었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암흑의 공간에
나는 던져졌다.
우리는 행복한 가족여행을 계획했을 뿐이었다.
태국에 도착한 지 단 하루 만에 우리 인생이 송두리째 뽑혀버렸다.
인생에 한 번쯤 일어날까,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을 쓰나미 같은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사십 년, 내 모든 인생이 채 몇 시간 사이에 산산조각 나 부서지고 감히 내일을 꿈꾸며 살아왔던 평범했던 우리 가족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이국땅 태국에서는 제발 한국으로 빨리 들어갈 수 있기만을 바랬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방콕과 칸차나부리를 몇 번씩 오가며 우리는 기적적으로 모든 서류를 정리하고 발급받았다. 태국 공공기관의 시스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조력자의 힘을 받는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무중력의 패닉상태로 빠져들었고 과연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앞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지 그때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막막함 뿐이었다.
당장은 순간순간 눈앞에 닥치는 일을 마주해야 했고 끝내야 했다. 따질 수도 없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이 어마어마한 일에 나의 모든 사고와 판단력은 정지 상태였지만 자신마저 정신을 놓아 버릴 수 없었던 남편은 나와 한비에 대한 한가닥의 실낱같은 책임감을 붙들고 간신히 버티며 그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렇게 남편과 태국에서 삼일 동안 사고 관련 조사와 서류를 끝냈다.
시우는 없고 마치 환영 같은 시우의 유골함이라는 것을 들고 우리 셋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비행기에 앉고 나서야, 아무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가운데서 '이제 지옥을 벗어나는구나'라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잃었다.
찬란했던
너무나 독창적인
한 우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 넷이서 첫 해외여행으로 열흘을 계획하고 태국으로 떠난 지 5일 만에 셋이 되어 돌아왔다.
장마가 막 시작되던 7월이었다.
우리가 태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는 장맛비가 억수로 쏟아졌다고 했다.
넷이었던 우리가 셋이 되어 다시 돌아온 그날, 배웅해 주셨던 날처럼 시부모님과 마주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소식에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며칠을 숨죽이고 울며 기다린 가족들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들의 장례식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치러야 했다.
성인이 되지 않은 자녀는 상도 치르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다.
시어머님이 다니시는 성당에서 친척들과 우리 부부의 가까운 친구들과 장례미사로 시우를 보냈다.
누구에게 어떤 연락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미사가 끝나고 성당에서 나올 때 어떤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비도 많이 오는데 여행을 왜 갔냐는 소리를 들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남양주 우리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다시 정신을 붙들어야 했다.
시우의 친구들과 이렇게 인사도 없이 아이를 보낼 수 없었다.
시우의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 친한 지인들을 부르기 위해 내가 섬기는 교회 목사님께 장례 예배를 부탁드렸다. 교회의 많은 분들이 정말 감사하게도 정성스럽게 시우의 예배를 준비해 주셨다.
시우 학교 같은 학년의 거의 모든 아이들과 선생님,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와 주었고 함께 울어주었다.
나는 실신하지도 목이 메도록 큰 소리로 울지 않았다.
단지 쉼 없이 흐르는 눈물만을 떨구며 그저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 보낸 어미가 왜 저리 멀쩡한지 이상하지 않냐고 수군거렸을지 모른다.
자식 잡아먹은 어미 아니냐고. 부모가 어떻게 생때같은 자식을 보내고도 저렇게 가만히 서 있는지 모르겠다고. 어찌 된 거냐고 대체 아이를 돌보지 않고 뭘 한 거냐고. 누군가 수군거려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그들의 자리에 서서 내게 돌을 던지고
부주의한 엄마라고 소리치며 머리채를 잡아 내팽개쳐 버리고 싶었으니까.
저는 이제까지 아이들을 위험한 상황에 둔 적이 없다고 자신했어요...
가끔 어린아이를 부주의하게 돌보는 엄마들을 마음속으로 비난한 적은 있어요...
저는 항상 아이보다 한 발 앞서서 주변의 위험을 제거하는 엄마였거든요...
지난 13년 동안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잘 돌봐왔으니까요...
그런데 하필 그날, 그 시간, 그 잠깐동안 왜 아이에게 눈을 떼었던 걸까요...
열대기후의 습하고 숨 막히게 뜨거운 날씨가? 아이들과의 첫 해외여행이라는 설렘이?
이제 어린이를 벗어나려는 엄마만 해진 13살 아들의 듬직함이?
무엇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을까요...
제가 방심한 그 시간이 대체 몇 분이었던 걸까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우리 아들이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