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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아 Sep 22. 2024

상실, 남겨진 고통에 대하여 #19

11살 한비의 미술심리치료 수업을 끝내며


한비가 받은 8번의 미술심리치료 수업이 끝났다.


어느 날 곁에 있던 오빠가 사라 저버린 죽음이라는 것의 실체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나의 가련한 딸 한비에게 심리치료가 필요했다.

어린이들은 심리상담이 대화로는 진행되기 힘들어서 미술심리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말로써는 아이가 자신의 심리를 어른처럼 얘기하는 것은 어렵고 미술을 활용한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해서

아이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8번의 미술수업 동안 만들고 그린 것들 중에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전해 주셨다.


나만의 가면 만들기

가면 위의 가면...  

너의 감정은 그토록 숨고 싶었나 보다...

너무나 화려한 가면뒤의 쓸쓸할 것 같은 너.


제주도여행에서 즐거웠던 일,

천지연 폭포에서 잡은 왕달팽이.


지난가을 행복했던 일. 또는 기억나는 일.

채집통 안의 잠자리 두 마리.


모두 스케치북을 꽉 차게 그린 그림이다.

상당히 특이해 보인다.

어릴 때 그림을 저런 식으로 크게 그려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처음에 미술치료라고 하니 내가 왜 치료를 받냐며 거세게 거부하던 한비였다.

그토록 가기 싫다는 녀석에게 맛있는 간식을 사주며,

수업을 받는 장소인 시청에 있는 재활용가게인 '아름다운 가게'에서 인형을 하나씩 고르게 하며  간신히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수업이 끝나니깐 섭섭하다고 그래도 오기는 싫었지만 막상 하고 보니 재미있다고 더 할 순 없냐고 하는 거다.


이 녀석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전에 낯가림이 참 많다.

새로운 일이나 처음에 싫다고 여긴 일에 있어서는 시작할 때 인내와 긴 설득이 필요한 경우가 꽤 다.

그럴 때 기분 맞춰주고 잘 구슬려서 시작을 하니 이렇게 소득이 있어서 다행이다.


수업 중반을 지나니 그래도 수업이 나쁘진 않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아주 인색하게 했었다. 미술치료사는 한비는 자기감정을 직면해서 표현하거나 말하는 것은 현재는 전혀 원하질 않는 상태라고 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상상하거나 꾸미는 이야기는 술술 잘 풀어나가지만...


아이의 세계관이 단단하고 약하지 않다고 현재 말하고 싶지 않은 감정에 대해서 굳이 꺼내려할 필요는 없으니 지금 상태를 인정해 주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하며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타고난 성격도 있는 것 같다며...


언젠가 자신이 풀어낼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혹은 자신을 투영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서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첫 수업이 9월이었는데 어느덧 겨울이 시작되었다. 아픔의 시간도 어느새  반년이 되어가고 있다.


견딜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시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흘러가고 있었다.

한비도 시우아빠도 나도 각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슬픔 속에서 애도하고

또 그렇게 감당하고 있는 서로를 보며 위로하고 보듬고 있었다.


수업이 있는 날 학교정문에서 한비를 기다리고 함께 버스를 타고 수업을 오가며 나누던 대화. 맛있게 사 먹은 간식들, 아름다운 가게의 쇼핑, 미술치료 수업도 모두 고맙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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