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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Oct 18. 2020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도는 학생

ADHD의 학교 생활 (품행장애 & 학습장애)

나는 25세에 성인 ADHD 판정을 받았는데, 학창 시절이라고 멀쩡했던 건 아니다. 15세에 검사를 받았다면 진작에 청소년 ADHD가 되었을 아이였다. 교실에서 내 모습은 <짱구는 못 말려> 속 짱구와 같았다. 비극적인 건, 짱구가 평생 속 편한 6살에 머물 때 난 점차 나이를 먹어간다는 거였다. 짱구는 쌍욕을 안 하는데, 나는 늘 살벌한 욕설을 구사하느라 예쁜 말씨를 쓰지 못했다.


나의 부주의함과 충동성은 매우 공적인 자리에서 불쑥불쑥 욕설을 내뱉는 것으로도 드러났다. 나는 슬프고, 어이없고, 화가 나고...... 이 모든 것이 “X발” 한 마디로 완성되었다. 당시엔 내가 “씨X”이라고 할 때마다 무엇을 잃게 되는지 몰랐다. 주변엔 비슷한 말투를 쓰는 친구들만 몰려들었고, 우리의 학교 생활은 함께 X발스러워졌다.


학교가 학생에게 바라는 과업은 명확했다. 공부 잘하고, 착하고, 성실해지기. 당연하고도 끔찍하게 난 그것을 이뤄내지 못했다. 말투는 거칠고 출결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제시간에 도착한 날보다 늦는 날이 훨씬 많았다. 일단 등교를 해도 수업 중에 바닥을 기어서라도 몰래 빠져나와야 마음이 편했다. 나중엔 출석부 속 내 이름 옆 결석, 지각, 무단조퇴 표시를 임의로 지워나갔다. 자퇴면 몰라도 유급은 정말로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성적 또한 담임을 약 올리는 방향으로 들쑥날쑥했다. 좋아하는 과목은 100점도 받았지만 싫어하는 과목은 한없이 0점에 수렴했다. 반에서 이렇게까지 편차가 큰 건 나뿐이었으므로, 어떤 선생님은 내가 얄밉다고 했다. 할 수 있으면서 죽어도 안 한다는 이유였다.


그 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날 서글프게 했다. 어떤 또라이가 할 수 있는걸 굳이 안 한단 말인가? 나는 OMR카드에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OMR카드를 규칙대로 작성하는 것조차 어려운 아이였다. 수학 선생님이 날 유인원 보듯 구경하러 납시는 게 좋아서 0점인 게 아니고 수학적 사고력이 머릿속 비무장 단체에게 총살당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성적 외에도 출석과 행실과 태도가 두루 좋지 못해 어떤 변명도 유효하지 않았다. 당시엔 학습장애나 품행장애라는 말이 생소하다 못해 없다시피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의심해볼 생각도 못했다. 그저 내가 나쁜 사람이라 나쁘게 자라고 있다고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당연히 선생님들은 나를 싫어하거나 난감해했다. 나 역시 난감한 미션에 의무감을 세뇌하는 선생님들이 싫었다. 그때는 쌍방 혐오라면 차라리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얼토당토않은 자기 방어에 불과하다. 나 역시 갈등보다는 긍정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아무랑도 싸우고 싶지 않은데 내가 왜 자꾸 싸움을 만드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선생님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부모님을 호출했다. 엄마는 내 수치스러운 행동에 자주 휘둘리다 종국엔 나를 수치 자체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부모와의 원만한 사랑도 최소한의 조건부임을 깨달았지만, 깨달음의 속도를 행실로 따라갈 수 없었다.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게 불가능했다. 어른들의 말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내가 실망하는 게 좋니.”, “이제 안 그러겠다고 약속해.”, “약속해놓고 왜 또 그러지?” 많이 듣다 보니 이해심이 형성되기도 했다.

나라도 나처럼 밉살맞은 아이는 정말 싫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들에게도 인과가 없고 두서가 없고 싸가지도 없었다. 베프들과는 잘 지냈지만 안 친한 급우들과는 폭행시비도빈번했다. 내 잘못일 때도 있고, 상대방 아이의 잘못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해결법이 늘 급진적이고 난폭했다. 그때의 나는 내 자신의 통제조차도 완전히 벗어나 있어서 고장난 트랙터 같았다. ADHD가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이해를 바랄 수 있나, 생각할 때마다 이 지점이 마음에 남는다. ADHD인 나도 ADHD의 피해자이지만, 당시 반 친구들은 더더욱 결백한 피해자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게 가장 불가해한 존재는 선생님들보다, 흔히 모범생이라 불리는 아이들이었다. 그 애들은 제게 주어진 과업을 무리 없이 해냈다. 입으론 힘들어하면서도 ‘어쨌든’ 완수했다. 나는 그 ‘어쨌든’을 돈 주고라도 사고 싶었지만 아무 데서도 팔지 않았다.


아주 성실한 아이 곁에 억지로 들러붙은 적도 있지만 우린 곧 서로에게 진절머리를 치며 떨어졌다. 의외로 성적이나 말투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굳이 꼽자면 윗사람과의 관계 인식이 정말 달랐다.


“선생님이 부탁한 거 해야 돼.”

“왜?”

“...? 선생님이 시킨 거니까.”

“거절하면 그만이잖아.”

“어떻게 그래.”

“선생님이 너한테 그런 걸 시킬 자격이 없잖아.”

“?”

“??”




“아 하기 싫다. 근데 엄마가 이거 안 하면 죽인대.”

“엄마는 널 죽일 수 없어.”

“그래도 해야지.”

“왜?”

“엄마가 시켰으니까.......”

“엄마가 원하는 건 엄마가 해야지?”

“넌 맨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화가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면에서만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집중력이 없어 성취도 없는 아이였고, 내가 뭘 배워가고 있다는 뿌듯함과 만족감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날 가르칠 수 없다는 건 아무도 존경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이 부분은 어른이 된 지금 약을 먹으면서도 채워지지 않아, 난 아직도 위아래가 없다. 내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은 있지만 위치나 직급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지금은 머리로라도 계급 트리를 인지하지만 10대 땐 정말로 서열에 대한 조심성이 없었다.


‘아이는 아이다운 게 좋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아이는 자신을 보호하거나 해칠 수 있는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어른들을 우습게 보던 내겐 언제나 안 웃긴 일만 생겼다. 매를 맞거나 벌을 받거나 생트집을 잡히거나 아끼던 물건을 빼앗겼다. 욕도 많이 먹었는데 10대 때 이런 일을 많이 겪으면 예민하고 방어적인 인간으로 자라게 된다.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진 못하리란 계시가 참으로 많고 많아서, 나는 귀찮게 큰 꿈을 꾸지 않았다. 학교도 잘 못 가고 공부도 못하는 데다 벌점이 전교 1등 수준이었다. 그런 내가 대통령이나 과학자, 판사 검사, 우주비행사...... 가 되는 모습 따윈 전혀 그려지지 않았고, 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가 되고 싶은 건 그냥 ‘사람’이었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모두가 정신이 없는’ 짱구 인생 말고, 훌륭하게 살 지 훌륭하지 못하게 살 지 결정권을 소유한 정제된 성년의 상태 말이다. ADHD 진단 후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데는, 이 미친 정신병이 내 10대를 홀랑 훔쳐가버렸음을 아주 뒤늦게 깨달아버린 게 컸다.


‘내가 나쁘게 살았다’는 후회는 미미해도, ‘내가 나쁘지 않게 살 수도 있었다’는 후회는 심각했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생각하면 아직도 솜주먹이 떨린다. 인생을 떳떳하게 여길 수 없었던 수많은 실수들이 ADHD에서 기인했다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내 병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나와 같은 10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꼭 검사를 권하고 싶다. ADHD가 저지르는 비행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결과가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의 결과이다. 생각 없이 살다가 생각지도 못한 인생을 살게 되기 전에, 부주의와 충동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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