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의 인간관계론
모든 또라이가 ADHD는 아니지만, ADHD들은 또라이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귀여운 의미는 전혀 없고 요즘 유행어대로 인성에 문제 있냐는 뜻이다. 긍정적이지 않은 데다 멸시가 가득한 표현이라 슬프다. 슬픔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게 덜 슬프단 얘긴 아니어서, 나는 몰이해의 벽을 만날 때마다 한 뼘씩 작아지곤 했다.
하지만 ADHD 주변인들의 고충도 이해한다. 전두엽에 각성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그로 인해 반드시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뜻도 되었다. 나를 낳아서, 태어나 보니 내 언니나 동생이라서, 친해서, 같이 일해서, 사귀어서 등의 이유로 무작정 나의 실수들을 감당해줄 의무는 없는 것이었다. 나역시 사람들이 내게 인내하는 상황 자체가 기회이자 기회의 제한인 걸 몰랐다.
내가 큰 실수들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사건들은 정도보다는 빈도 면에서 상대방을 열 받게 했다. 평생을 충고가 통하지 않는 아이로 살며 수집한 평가는 아래와 같다.
1. 충분히 설명해주어도, “왜? 언제? 누가? 내가? 아닌데? 몰라? 어떻게 알아?” 등으로 되묻는다.
2. 나이에 맞지 않는 사고를 한다. 대책 없는 결정, 허술한 계획, 시공간을 가리지 않는 공상과 몽상 등
3. 사소한 물건, 말꼬리 잡기에 집착한다.
4. 주변이 너저분하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다.
5. 명령이든 공동체 편의를 위해 모두가 합의한 룰이든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
6. 생각 없이 말한다. 방금 그건, 생각이 있다면 하지 않을 말이다.
7. 얘가 멍청한 건지 날 우습게 보는 건지 헷갈리게 만든다.
8. 뭘 하든 두 번 손이 가도록 만든다.
9. 말이 많은데 영양가 없는 말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대화가 피상적이다.
10. 공지사항과 준비물을 숙지하지 않는다.
11. 잘 깨고, 잘 떨어트리고, 잘 잃어버린다. 본인 몸도 잘 다친다.
12. 자꾸 찡얼대는데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13. 우연히 꽂힌 흥미, 사람, 취미에 1차원적으로 집착한다.
14. 무리하게 파고들다 무리하게 정지한다.
15. 모든 판단의 기준이 본인이며, 개인의 자유와 상대방 배려의 경계선을 모른다.
16. 기분 나쁘면 혼자만의 세계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17. 순서가 재구성된 기억들을 진실로 여기고 있다.
18. 유흥에 대한 통제력을 쉽게 상실한다. (돈, 술, 약, 쇼핑, 도박 혹은 이와 비슷한 구조의 향락)
19. 상대방 반응 이면에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을 캐치하지 못한다. 눈치가 없거나 타인에게 무관심해 보인다.
20. 그 외
지금까지 서술한 것보다 광범위한 네거티브가 내 생활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난 차마 팰 수 없지만 패고 싶은 유형의 가족, 친구, 애인, 상사, 부하직원, 동료로서 사람들 곁에 머물렀다. 듣기로 나의 최악은 '변할 듯 변하지 않으며 끝끝내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제일 싫어했던 말은 고의성에 대한 오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부족한 행동에 대고 “너 일부러 그러냐” 물어댔고, 대답을 주기도 전에 이미 화가 나 있었다. 그 질문을 들으면 머리 뚜껑을 열고 속을 보여줘서라도 결백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열 수 없다면 가슴이라도 열고 싶었다. 자 여기 보세요, 제가 당신에게 실수한 만큼 당신도 기어코 제 마음을 찢어 놓으셨어요. 저는 본의가 아니었는데 당신은 본의를 이루셨네요? 빈정거림으로써 책임전가를 해버리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반응도 잘 알아서, 일부러 가끔 써먹었다. 그들은 보통 “사소한 걸로 난리 치지 좀 말라”라고 할 때 불같이 화를 냈다. 이미 내가 주는 과부하가 사소한 영역을 넘었는데, 본인이 태평한 소리나 하니 화가 날 만했다. 어쨌든 한 두 방씩 주고받다 보면 난폭해진 갈등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니 맘대로 해. 어차피 맘대로 할 거잖아.”
“난 한 번도 내 맘대로 다 한 적 없어!”
“왜 늘 이렇게 똑같은 실망을 주니?”
“그런 내가 좋다고 한 건 너야. 왜 이제 와서 싫다는 거야?”
“제발 부탁이니 정신 좀 차려라.”
이 말엔 유일하게 할 말이 없었다. 나야말로 내가 정신을 좀 차리길 바랐지만, 정신은 밥상처럼 차려지는 게 아니었다. 밥상처럼 발로 찰 순 있지만 여튼 아니었다.
“나 열 받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
나는 이 즈음부터 가망 없어진 관계를 회피했다. ‘나를 떠나간 사람’의 범주에는 내가 선수 쳐 끊어버린 인연이 더 많다. 이미 이상함을 감지한 사람에겐 내 의견을 피력할 의지나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구구절절 털어놓은 초라한 진심조차 ‘이상함’의 증거로만 수렴된다면, 내가 그 실망과 낙담을 견딜 수나 있을지 무서웠다.
지루하게 변명하자면...... 나는 애초에 ‘일부러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어떤 행동을 미리 구상하고 실현할 만큼 스스로 제어 가능한 타입도 못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난 진작부터 명석함과 꼼꼼함을 연기해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내게 A/S가 필요하다 느낀 이유는 내가 진실로 고장 나 있어서일 뿐 반전은 없었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이고 내가 선의의 피해자였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피해자는 역시 내 지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슬프게도, 수없이 지적당해 외울 지경인 20가지 증언들은 거의 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되갚지 못할 남의 인내를 마구 끌어다 쓰는 게 감정적 사채빚과 같다는 걸 몰랐다. 관계라는 게 그렇다. 상대방이 양보할수록 자유도가 강화된 내 삶은 편안해진다. 나의 패착은 편안함을 느낄 때마다 착취적으로 굴었다는 데 있었다. 1개를 내어주면 2개를 달라고 하고, 2개를 받아낸 후엔 3개를 취했다. “멀쩡한 네가 나 좀 참아 줘” 이런 바람을 은연중에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시에도 구렸지만, 몇 년 후 복기하는 지금 와서도 구린 일이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의 난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도 혼란을 목도하길 두려워하는 겁쟁이였다. 그래서 나의 미숙함이 타인의 성숙함을 해칠 때도 본질을 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 남자가 끝나면 저 남자에게로, 이 친구가 가면 또 저 친구에게로...... 엄마와 생활 패턴이 안 맞으면 다른 집을 얻고 회사에 나쁜 사람이 있으면 이직했다. 내 발에 모터와 날개가 한꺼번에 달렸나 보다 생각했지만 실은 한 발짝도 못 가고 고여있던 시간이었다.
떠나간 사람들,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을 완전히 놓겠단 명목 하에 전부 잊었다. ADHD의 몇 안 되는 순기능은 나쁜 추억을 망각하기 쉽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는 대신, 잊고 싶은 건 삭제에 가깝게 없애는 능력을 얻은 듯하다.
하지만 도망치다 보니 결국 제자리임을 깨닫고 잊었던 과거를 끄집어내 재정렬 중이다. 그때 응당 했어야 할 반성이나 반격 면에서 누락된 것이 있는지 체크해 본다. 너무 많아서 다시 잊을지 모르지만, 내가 곧 반성하는 인간이 되기도 질릴지 모르지만, 맨날 욕만 먹다 생각을 해볼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