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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Nov 20. 2020

감정적인 리더는 유죄다

스타트업 일진짱 제임스

내가 전 회사 대표 제임스를 싫어했던 이유는 참 여러 가지이다. 업무로 만나 업무만 하는 사이에 이렇게 다채로운 이유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개중 제일은 제임스가 너무 감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제임스가 감정적이라는 걸 여지껏 기억하는 나도 이성적이진 않으나, 제임스는 심했다. 나보다 25살이나 많은데다 학벌도 높고 돈도 많으면서 왜 그리 감정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바로 그 이유들로 이성적일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여튼 제임스는 맛이 가기 직전 외장하드처럼 오락가락했다. 연결이 잘 될 때도 있지만 대개 먹통이었다.


스타트업 대표란 인사팀장이자 상품팀장이고 광고팀장이며 마케팅팀장이었다. 게다가 경영지원팀장, 고객서비스팀장, 운영팀장, 개발팀장도 되는 것 같았다. 이미 누군가 그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제임스의 횡포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우리가 신제품 가격 정책을 이렇게 짰던가?”

“네.”

“근거가 뭐예요?”


제임스는 가끔씩 존대를 함으로써 냉정한 카리스마를 뽐내려 했는데, 그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자기 내부의 열로 회의실을 한증막으로 만들겠단 예고이기도 했다.


“원가와 타겟 상품 가격, 목표 매출, 예상 광고비들을 계산하면 대략 그렇게 나옵니다. 여기 시트를 보시면......”

“대충? 무슨 소리야. 대충하면 안 되죠. 다들 어떻게 생각해?”


사람들은 ‘대략’과 ‘대충’ 사이의 의미 차이를 알지만 모두 침묵했다.


“난 일단 원가가 얼만지, 경쟁 제품은 얼만지, 월별 KPI는 물론 광고비까지 전부 따져봐야 한다 생각해. 아냐?”


맞다.


그리고 그게 방금 마케팅 팀장이 한 말이었다.


제임스는 기분이 나쁠 때마다 누가 짱인지 알려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휘둘렀다. 나 같은 주니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좌우로 구르다 어지러움을 느꼈다. 제임스는 내심 그 모습을 기꺼워했는데,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좋은지 그 고통을 자기가 줬다는 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나중엔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내 생각에 요령이란 잡초 같은 것이다. 아스팔트 같은 환경에서도 꿋꿋이 자라나지만 약간 하찮다. 내가 쓰는 수법은 보고 안건을 돈 드는 얘기와 돈 안 드는 얘기로 구분짓는 거였다. 제임스의 기분이 최상일 땐 돈 드는 얘기부터 하고, 반대일 땐 돈 안 드는 얘기만 했다.


제임스의 기분이 최악이면 일부러 비용이 참 많이 드는 플랜을 소개하고, 훨씬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는 본론을 어필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제임스는 아낀 비용을 번 것 같은지 좋아했다. 이런 방법은 60%의 확률로 괜찮았다.


나머지 40%를 보완하기 위해 제임스의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이상한 탐구에 빠져 든다. 제임스는 꼴에 괜찮은 여친이 있었는데 그 여친과의 사이는 괜찮지 않은 듯 했다. 회의 때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다면? 그 날은 내부적 영업 종료와 같았다.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고 누구든 핀잔을 들었다. 예산은 감축되고 기부 마케팅이 정지됐다. 쪼그라든 업무는 제임스의 연애전선이 화창해질 때 쯤 원상복구 되었지만 그대로 잊히는 것도 많았다.


가끔 제임스의 분노는 직원들을 향하기도 했다. 제임스와 맞서 싸우려는 용자들이 분기마다 나오기 때문이었다. 제임스는 가진 것도 못가진 것도 두루 많은데, 일단 논리가 없고 참을성이 없고 양심이 없었다. 남의 말도 잘 안 들어 고차원적 의견 교류가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한 번 사이가 틀어지면 얼마나 질리게 구는지 당사자도 아닌 내 마음이 힘들어지곤 했다.


제임스와 척진 이들은 전부 2주를 넘기지 못하고 퇴사했다. 내키지 않는 굿바이 티타임을 가질 때마다, 잡플래닛에 1점 짜리 저주가 늘어날 때마다 내가 ‘아직도’ 제임스의 졸렬왕국 시민임을 되새기며 슬퍼졌다. 제임스의 왕국이 얼마나 초라한지 떠올리자면 내가 여길 탈출하지 못하는 이유들도 줄줄이 초라해졌다.


그런데 제일 슬픈 건 이다지도 존경스럽지 못한 제임스가, 내가 겪은 대표들 중엔 개중 낫다는 거였다. 내게 제임스는 절대평가로는 F지만 상대평가로 보면 B인 리더였다. 제임스 이전의 진상들이 제임스의 진상짓을 방어해준다는 건 인상적이었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인상을 쓰게 될 정도로 그랬다.


어쨌든 시간은 무럭무럭 흘러갔다. 감정적인 제임스 밑에 있자니 나의 희로애락은 자연히 거세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성깔을 관람하며 좀 더 어른이 된 것일까, 울지 않는 아이로 남은 것일까?


뭐가 됐든 제임스에게 고맙지는 않다. 물론 제임스도 n년을 딱 채운 후 냅다 튀어버린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보다 오래, 나보다 희생적으로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에게는 좀 고마워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이 착하고 어린 게 어디 제임스를 위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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