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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Nov 30. 2020

이토록 시시한 서른

92년 생의 29세 마침표

지금 92년 생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내가 서른이라니! 그리고 서른이 이렇게 시시하다니......."


내년까지는 30일이 남았고, 한 달은 참 많은 것이 바뀌는 시간이지만 2021년 1월 1일까지 드라마틱한 이벤트는 없으리란 예감이다. 낙관을 펼치기엔 코로나의 기세가 너무 세고, 내 의지는 약하며 날씨는 지독하게 춥다. 올해는 모두 함께 즐겁지 않기로, 울면서 약속을 한 것만 같다. 놓쳐버린 벚꽃과 여름휴가, 해외여행을 생각하면 크리스마스나 망년회에 대한 기대도 팍삭 식어 버린다.


구질구질한 이십 대를 견디면 서른 쯤엔 보상이 주어질까 기대한 적도 있다.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것 중 무엇도 나를 위해 긍정적이진 않았다. 내가 치열하게 만드는 긍정이 아니라면 모두 부정이었다. 나는 삶을 이해하며 좀 더 가난해졌고 좀 더 나다워졌다. 29.9세의 길목에서 내가 잃은 것과 깨달은 것들을 나열하자면 한껏 부끄럽고 자랑스러운 기분이 동시에 든다.


부끄러운 기분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어릴 때도 미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는데, 그래도 서른 쯤엔 돈이 꽤 많을 줄 알았다. 나는 배포가 작은 사람이라 '꽤'라는 액수는 몇 백만 원의 가용 현금 정도이다. 하지만 저축은 하나도 없고 학자금 대출은 넘치며, 돈 쓸 데는 그보다 더 넘치는 삶만을 겨우겨우 유지하는 중이다. 술 먹고 취하면 내가 사겠다 말하는 버릇을 못 고치면서 자주 술을 먹는 게 개중 제일 거슬렸다.


나는 매일 취해서 부끄럽고, 멀쩡할 때도 취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부끄럽다. 하지만 부끄러운 삶보다 최악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자신하는 삶이라 생각하면서 나를 다독인다. 억지로 긍정을 꾸며내지만, 실은 내 인생이 정방향으로 가는지 역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르겠어서 부끄러움의 중량은 줄지 않는다.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게 낯설어 죽겠는데 어떻게 이 감각을 해소할 수 있을지 대책이 없는 점도 부끄럽다.


반면 부끄러움에 민감해졌다는 점은 자랑스러웠다.


내 20대는 한없이 유아적이었다. 나는 늘 칠칠치 못하고 미덥지도 못해서 가족과 친구와 남자 친구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날 지켜주지 않으면 보란 듯이 다치고 굴러 버렸다. 내 주변의 다정한 사람들은 나를 신경 써야만 한다는 찝찝한 의무감에 사로잡히며 나랑 놀았다. 서른을 앞둔 지금 나는 생애 처음으로, 그들의 수고에 화답하고자 스스로 1인분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사실 대단한 결심들은 아니다.


느끼는 감정 바로 내뱉지 않기, 눈물이 난다고 울지 않기, 죄책감과 열등감을 추방하고 그게 다시 오지는 않나 감시하기, 남이 사랑하는 것들을 남의 시선에서 같이 사랑하기, 위로받기 위해 하소연하지 않기, 불필요한 진실은 생략하기, 외모에 집착하지 않기, 욕구불만을 채우려 먹지 않기, 땅바닥에 자빠지지 않기, 알람이 울릴 때 눈 뜨기 등등이 나의 서른을 꾸려갈 지침이었다.


조금만 괜찮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공감 못할 항목이지만, 나만의 부족한 삶 속에서는 치열한 쟁점이 되는 것들이다. 19살에나 어울리는 새해 목표들을 29살에 세우고 있으니 늦었다 싶기도 하지만, 인생엔 저마다의 속도가 있음을 최우선적으로 명심하려 한다. 그래야 나보다 빠른 사람을 존경하고 나보다 느린 사람을 존중하는 서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드디어 자정을 지나 2020년 11월 30일을 맞은 지금, 나는 서른의 성과보다는 서른의 태도를 고민 중이다. 고민의 속성은 직선적이지 않고 환원적이라 생각은 돌고 돈다. 어떤 서른이 될 것이냐는 어떤 어른이 될 것이냐는 물음과 같아서, 한 마디로 답을 내려는 시도조차 경솔해 보인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모든 92년생들이 머리를 모아 서른의 태도를 고민 중일 테니, 내년의 우리와 내년의 지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IMF 키즈로 자라 코로나 서른이 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불행을 겪는 중이라고 오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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