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당신의 몸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의 몸입니다. 나는 우리의 편지가 너무 방정맞고 격 떨어질까 봐 존댓말을 씁니다. 당신은 나 자신이지만 한 번도 당신에겐 존대를 한 적이 없어요. 나는 내가 대우받지 못할 인간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부르는 호칭은 ‘미친’ 혹은 ‘헐’ 뿐이었습니다.
“미친”이나 “헐”이란 발음이 생성되면 우리에겐 무슨 일이 생긴 것이잖아요. 당장 해결해야 할 지출, 지각, 누락과 같은 기분을 망치는 일들이요. 지난 1년 간 어쩐지 기분을 망칠 때마다 끊임없이 당신 탓을 했던 거 같아요.
이런 멍청이! 또 실수를 하다니.
나는 정말 밥 없는 밥통이다.
이런 말들을 참 많이 했는데...... 이제는 나의 폭언을 사과하고 싶어요. 난 세상의 편을 드느라 맛이 가 있었고, 그게 성인으로서 인생은 배려하는 방식이라 여겼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틀렸어요. 역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과 나, 그러니까 우리이고 나는 우리가 남들보다 월등히 행복하길 원합니다.
남들의 행복은 남들이 찾는 게 그들 삶의 의무겠죠. 내가 너무 도울 필요는 없었어요. 교양 있는 하녀처럼 굴 필요는 없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매번 그런 식이 더군요. 나는 차라리 나의 하녀가 될래요. 내년에는 나로 인해 고단하고 나로 인해 기쁘며 가치판단 없이 행복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당신은 이쯤에서 조금 화가 나고 어이없어질 수도 있겠죠. 작년에는 오로지 착해지자고, 주변을 위해 희생하고 변화하자고 주먹을 불끈거려 놓고 이제 와서 생각을 바꾸다니요. 하지만 맹목적으로 착하게 굴다 보면, 다짐하던 불끈 주먹으로 상대를 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나는 진정한 착함이 뭘까 늘 궁리해요. 그건 남을 때리고 싶다는 욕구조차 안 느끼는 경지 같아요. 당신과 나는 늘 약간 화가 난 상태로 평온을 가장하고 있지만, 올 한 해 우리 마음속에서 몇 명이 얻어 맞거나 죽었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착해지자’는 데뷔하지 않는 연기자로 살자는 다짐일지 몰라요. 하지만 알잖아요, 당신과 나는 연기에 재능이 없고, 우리의 발연기는 인생을 복잡하게만 만든다는 걸. 우리가 어설프게나마 속일 수 있는 건 언제나 자기 자신뿐이었고 그게 언제나, 남을 속이는 것보다 나빴지요.
자기가 자기를 속인다는 건 세상 무엇도 내게 솔직하지 말아 달라는 경고 같아요. 나는 인생을 오해할 작정이니 인생은 부디 나를 가르치지 말라고 선 긋는 것 같아요. 어떻게 아냐면 우리의 20대가 그랬잖아요.
우리의 지루하고 흔한 싸움들...... 난 그것도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일어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해야 할 일을 놓쳤을 때 난 항상 “마음가짐부터 틀려 처먹었다”며 당신을 비난했어요. 당신은 절대 지지 않아요. “몸뚱이가 무겁고 게으르니 아무것도 안 되지”라고 내 주장을 받아치죠. 우리가 서로 씩씩대다 화해하는 과정이, 왜 꼭 배달음식이어야 했는지 의문이에요. 우리의 전쟁은 무색무취인데 해결은 항상 오색찬란한 외식이었죠...... 몸과 마음이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게 음식뿐이라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내년엔 그런 특징을 버려 보아요. 나는 배달 음식이 좋지만, 배달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더 멋질 거 같아요. 당신도 내 의식에 사령탑에서, 배달의 민족이나 요기요를 켜라는 명령을 멈춰 줘요. 나도 하루 종일 짭짭 대는 입술을 가지런히 닿아 놓을게요.
솔직히 아직도 어떤 영광을 버리고 어떤 굴욕을 채택하며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단순한 진리 하나는 “솔직해지라”는 거죠.
아직 2020년 12월이니 지금부터 바뀌면 2021년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실수투성이의 밥통이지만 원하는 걸 맛도 못 본 적은 없어요. 유능하다 말아버린다는 건 유능하거나 무능한 것보다 다채로운 가능성이죠, 당신도 알죠? 우리는 원하는 곳으로 못가도 원하던 것보다 멋진 곳으로는 갈 수 있을 거예요. 마음과 몸 그러니까 당신과 나 둘이 화합하기만 한다면요.
솔직한 이기심을 택하자는 나의 제안을 오해하진 말아줘요. 진짜로 남들을 막 때리고 일도 안 하고, 돈도 안 내며 반성 없이 살면 짱 좋겠지요. 하지만 그러면 우린 어디로 가죠? 맞아요 당신과 내가 너무나 두려워하는 감옥에 가요. 감옥에선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느라 머리 터질 일은 없겠지만 뭔가 중요한 다른 게 분명히 터지겠죠.
우리 내년에는 솔직하게 이기적이되 그걸 들키지 말고 살아요. 주변에 나에 대해 너무 알려주지 말고, 약간의 비밀을 약간의 멋짐이라 여기며 살아요.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내게 협력하는 당신이 있기에 너무 많은 남이 필요해지진 않을 것 같아요. 아주 오랜 세월...... ADHD라고 쌍욕을 퍼부었던 걸 진심으로 사과해요. 이게 본론인데 추신처럼 덧붙이는 용기 없는 행동을 이해해줘요. 당신은 똑똑하고 상냥해요. 어떤 사람이 난폭한 동시에 상냥하다는 건 모순적으로 괜찮죠.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ADHD 역할을 스티브 잡스와 에디슨에게 가로채인 게 아쉽지만, 2021년 힘내 보아요. 올해는 당신과 내가 “내년엔 잘해보자”는 결정에 공식적으로 합의한 최초의 순간이네요. 당신과 나 서로 싸울 거면 차라리 남과 싸우자는 제안을 드리며 편지 마쳐요.
안녕 안녕, 우리 모두 부디 안녕입니다.
- 당신의 신체 각 기관들의 연합으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