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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Dec 07. 2020

윗집에 꼬마아이가 생겼다

전에 없던 쿵쿵거림과 천진한 소음 때문에 꼬마 입주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천장 쪽에서 꺄르륵 웃는 소리, 발 구르는 소리, 있는 힘껏 뛰는 소리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우리 건물은 주상복합 오피스텔이고 대부분 싱글 가구여서 아이의 기척 자체가 낯설었다. 생각해보면 여기서 가장 큰 평수도 아이방을 따로 꾸릴 수는 없는 구조였다. 애기도 여러모로 답답하겠다 한숨 쉬면서, 밖에 못 나가니 안에서 재미를 찾는 중이구나 생각했다.


층간 소음을 겪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여기 말고 전에 살던 집이 더 심했다. 나는 건물을 우유팩으로 세웠나 의심하며 시름시름 앓았다.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소음은 들릴 때를 넘어서 들리지 않을 때도 극도의 불안감을 주었다. 나는 윗집이 팔릴 때까지 윗집의 모든 구성원과 개와 가구들을 미워했다. 민폐지만 착했던 이웃들은 내가 미친 여자처럼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정중히 사과했다. 하지만 마음은 손톱만큼도 풀리지 않았다. 집에 내려오면 또다시 아까보다 시끄럽기 때문이었다.


꼬마 공주 노는 소리가 나의 안정을 얼마나 해하는지 쓰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소리의 주체라고 말한 이상 아이에 대한 공격이 될 것 같아서다. 다만 전 집에서 안심하고 분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윗집에 사는 이가 모두 성인이기 때문이었다. 그 집에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좀 더 참고 좀 더 웃었을 거였다.


어린이의 속성은 잘 모르지만, 모두 다채롭게 세상을 보고 느끼도록 설계된 존재 같았다. 어떤 아이든 공동주택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단 어기는 쪽이 훨씬 재미있을 거였다. 오로지 재미만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아이 시절의 기쁘고도 서글픈 특권이기도 했다. 한 아이의 어린 날은 너무 빨리 지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니까, 비교적 늙은 내가 우리의 나이차만큼은 참아 보자 결론지었다. 참기 힘들어도 마침 연륜을 쌓을 기회라 생각하자고.......


나는 소음에 무디지 않고 오히려 남보다 몇 배로 예민한 편이었다. 별달리 아량 많은 성격도 못되었다. 그래도 아이와의 갈등에서 어른이 심하게 노발대발하는 건 멋쩍다고 여겼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원하는 태도를 완전 내면화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시간 내어 약자에 대한 이기심을 경계할 때가 되었다는 뜻 같았다. 지구를 공유하며 사는 동안 힘들어도 힘들여 해내야만 하는 과업이었다.


소음이 싫어서 멀쩡한 티브이도 없애고 노래 감상도 하지 않지만, 그게 윗집 꼬마의 아이다움이 말살되어야 할 이유라곤 생각지 않았다. 아이 부모님께 부탁해볼 궁리는 했다. 하지만 아이 부모가 저자세든 고자세든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그 아이의 보호자가 내게 허리를 숙인다면 나는 “허허허, 애가 좀 뛸 수도 있죠.”라고 내뱉고 집에 와 후회할 것이다. 같은 대사를 그쪽 부모가 한다면? 그건 차라리 재앙이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 꽃게처럼 거품을 물다가, 애가 좀 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면 폐기하고 그 가족의 추방만을 바라게 될 것이었다. 아이 부모가 양심 없을 확률은 내가 그 가족을 미워하게 될 확률과 같았다. 목소리에 장난기가 많고 씩씩한 아이의 보호자를 미워하게 될까 봐 한 번도 윗집에 올라가지 않았다.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물리적 데시벨을 이기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어폰을 끼거나 귀를 막기보단 차라리 꼬마 입주민이 무엇 덕분에 저리 신이 났나 들어 본다. 들으려 하다 보면 명확히 안 들려서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장군 같기도 하고 공주 같기도 한 윗집 꼬마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굉장한 즐거움을 느낀다. 아빠한테 혼나고 와아앙 울기도 한다. 그 모든 점이 참으로 아이답다 생각한 후 구태여 다른 코멘트를 달지 않는다. 이건 비대면 시대의 이름 모를 이모가 이웃 아이에게  최대한의 긍정과 존중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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