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의 추억
섬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달리는 걸 좋아했고 할아버지와의 제주 일주 여행을 하고 나서는 어쩌면 이 섬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제과점 뒷문을 통해 영화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에서 수많은 영화를 봤다. 그 영화 속의 무대는 대부분 서울이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자주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고 있었다. 소녀들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바람은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았고 흩날리는 소녀의 머리띠는 평화의 표식 같았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난생처음 서울 구경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세상은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눌한 서울말은 안 하고 살면 그뿐이었지만, 반찬으로 나온 두부를 한 입에 먹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은 건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겨울과 봄이 지나고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치니 여름 방학이 되었다. 이제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보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이면 어머니를 뵐 수 있었다. 하지만 김포공항까지 가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일단 잠실까지 가서 공항버스로 갈아타고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해야 하며 제주에 내려서도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 했다. 중학교 1학년생한테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바짝 긴장한 채로 서울을 가로질러 공항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서 탑승권을 받는데 ‘해당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보다 결항이 심했던 때였고 다음 날 항공권을 주었다. 다음 날 항공권을 받아 들고 다시 잠실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즈음이었다. 그래도 내일이면 다시 집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똑같은 경로로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몇 시간의 대기 끝에 다시 결항이라는 말을 들었다. 같은 길인데도 어제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내 손에는 다음 날 항공권이 다시 들려있었다.
다음 날. 비행기가 드디어 이륙했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머니와 단 한 번도 헤어져서 살아보지 않은 소년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구름 사이로 한라산이 보였다. 비행기는 백록담을 중심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한 번 돌고, 돌고, 돌고. 밑에 보이는 집들 중에 우리 집이 있나 찾기도 했다.
그러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있겠다고 하고는 일부러 잡음을 끼워 넣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당 항공기는 안개로 인해 착륙이 불가하여 김포로 회황합니다. 승객 여러분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할 수만 있다면 뛰어내리고 싶었다. 저 밑에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가 있는데 말이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마 울었던 것 같다. 다시 잠실로 가는 공항버스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 앞 골목을 힘없이 걸어가야 했다. 그 길은 정말 멀었다. 온종일 굶은 것은 물론이고.
다음 날. 우체국에 가서 장거리 전화를 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딱 한 마디밖에 못했다. “엄마···”.
공항에 가는 걸 좋아한다. 아주 심하지만 않다면 비행기 이착륙 소리가 들리는 곳에 살아도 괜찮다. 저 착륙하는 비행기에는 누군가 밝게 웃으며 타고 있을 것 같다. 이륙하는 비행기에는 어머니와 헤어져서 울먹울먹 한 표정을 짓는 소년이 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