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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완 Jan 22. 2016

그녀들의 이어도

외할머니는 경남 진주 근교의 작은 마을이 고향이라고 하셨다. 일본으로 우정 업무를 배우러 가셨다가 부산에서 근무하게 된 외할아버지를 만나 제주로 시집오셨다. 열여덟 나이에 대한민국 최남단 마을로 오게 된 할머니는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선 것 투성이었다. 세월은 흘렀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집온 후 처음으로 고향에 갔다. 섬에 들어온 이후 섬 밖으로 나간 것도 처음이라고 하셨다.


이팔청춘 꽃다운 처녀는 환갑이 넘었고 고향 마을에는 오빠 한 분이 살아계셨다. 세월은 잔인했고 채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서로 나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헤어졌다고 했다. 진한 남부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오빠의 언어는 그녀에게 처음 제주로 시집왔던 열여덟 시절의 제주어만큼 어색했다. 그 이후로 다시 고향을 찾지 않으셨다. 자리 잡은 이모며 장성한 삼촌들이 서울과 대전에서 모시고 살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서울, 대전을 오가며 사시다 일 년을 못 채우고 제주로 돌아오셨다. 그때 외할머니께 찾아갔었다.


어린 시절을 외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았던 손자는 어느덧 중학생이 되어 섬을 떠난 후였고 다시 찾았을 때, 외할머니는 할아버지도 돌아가신 텅 빈 집에 혼자 살고 계셨다. 외할머니는 혼자 김치를 담그고 계셨다. 일 년 내내 배추와 무가 떨어질 리 없는 제주에선 김장행사가 크지 않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혼자 사시니 일일이 배추와 무를 미리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양념을 채워 김치를 담갔다. 김치 담그는 할머니 곁에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는 왜 이모나 삼촌들이 있는 곳에 가서 같이 살지 않아?”


외할머니는 “여기엔 친구들이  있거든.”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사는 게 좋아.”라고 덧붙이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의 시집살이가 막 시작할 무렵에 시어머니가 “우영밭에 강 노물 좀 가정 오라.”라고 하셨다. ‘우영밭’이 ‘텃밭’인지 모르는 외할머니는 시어머니의 명령에 뒷산으로 갔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날이었다. 아무리 제주도라도 그런 한겨울에 산나물이 있을 리 없다. 산을 헤매고 헤매다 날이 저물어 빈손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시어머니는 저녁 식사 준비도 안 하고 어디서 놀다 왔느냐며 도끼눈을 뜨고 말도  못 하는 못난이라고 혼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고 그래서 자꾸만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항상 웃으셨다. 



그리고 다른 할머니가 계셨다. 친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같은 마을 출신이고 마을 해녀 대장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호통에 말 한마디 못 하는 외할아머니와는 달랐다. 어쩌다 할아버지께 되려 큰 소리를 내기도 하셨다. 두 분 다 세 번째 부인이라는 것은 같았다.


할머니는 베개 밑에 커다란 칼을 깔고 주무시기도 하고 누군가 용한 점쟁이나 무당 얘기를 하면 삽시간에 믿음을 바꿨다. 부적이 떨어질 날 없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먼 길 떠나는 손자에게도 붉은 부적이 들려있었다. “지완아. 이거 정말 비싼 부적이란다.” 마을의 주요 종교를 섭렵하던 할머니는 개신교회에도 다니셨다. 종교는 할머니에게 구원이었을까? 보험이었을까?


할머니는 밭에서 일하며 노래를 하셨다. ‘이어도 사나’, ‘오돌또기’ 같은 노래를 했다. 아낙들은 줄을 맞춰 쪼그려 앉아 서로 주고받으며 노래했다. 그녀들이 갈았던 검은 흙의 밭에서는 초록의 배추나 무가 자라나기도 했고 노란 유채로 꽃밭을 이루기도 했고 황금색 보리가 물결치기도 했다. 


캄보디아에 처음 갔을 때, 길을 사이에 두고 코코넛을 파는 사람들이 그렇게 노래했다. 손님이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을 때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면 반대편에서 장단을 맞췄다. TV가 있는 집 앞에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 함께 보고 있었고 라디오도 흔치 않았다. 시선은 서로를 향했고 작은 새소리에도 입꼬리를 올렸다.


할머니께 장성한 아들들이 어디든 유람을 권했었다. 한사코 마다하는 할머니께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는 왜 놀러 안 가?”


할머니는 “그거 강 뵈리민 눈에 매돌앙 올 것까?(그거 가서 보면 눈에 매달고 올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속으로 그러려면 ‘이어도 타령’은 왜 하나?’ 그렇게 좋다고, 가고 싶다고 노래하는 이어도는 못 가더라도 그 좋다는 육지 구경은 왜 가지 않는지 답답했다. 손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외할머니는 편집증을 앓고 계셨던 외할아버지의 등쌀에 평생 기 한번 못 피고 사시다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와 홀로 사시다 조용히 돌아가셨다. 친할머니는 손자의 등에 업혀 평생 사시던 집으로 가셔서 그날 밤 한숨을 쉬듯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손자는 그 이후에도 ‘이어도’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이어도는 제주인들이 꿈꾸는 이상향이다. 바다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아내들은 갯가에 나가 돌을 주워 탑을 쌓았다. 아무리 탑을 쌓아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들은 그가 이어도에 갔을 거라 생각했다. 사바세계 저편의 이승의 번뇌를 벗은 해탈과 열반의 섬. 


실제로 이어도는 여러 역사 문헌에도 등장하고 그를 근거로 마라도 남서쪽의 암초를 ‘이어도 해양 과학 기지’로 명명했다. 어쩌면 그것이 실제 이어도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이 이야기하고 노래하던 이어도로, 남편이 가 있는 작은 섬으로, 가고 싶어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염원하고 노래할 뿐이었다.


그녀들이 살았던 집이나 일하던 들판은 이어도는 아닐지라도 어쩌면 조금씩 이어도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혹독한 기후와 매서운 바람. 그보다 심했던 시집살이에도 쪼그려 앉아 검질(김) 매던 손으로 조금씩이나마 그녀들의 이어도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를 안고 계신 할머니(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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