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쌈 이야기
어머니께선 마을에서 최초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다른 일곱 명의 여학생 중 한 분이다. 아직 여고가 없던 때에 남학생들만 있던 고등학교에 다니신 것이다. 이듬해에 바로 여고가 개교해 어머니를 비롯한 일곱 분은 대정여자고등학교가 아닌 유일한 대정고등학교 출신 여학생들이 되었다. 이분들은 아직도 모임을 하고 돈독해 보인다. 일곱 명의 여학생들은 항상 함께 등교하고 교실 맨 뒤에 나란히 앉았다. 하교도 같이했고 결혼도 비슷한 때에 하셨다. 그래서 자녀들끼리 친구인 경우가 많다.
고교를 졸업한 후, 이제 성인으로서 처음으로 다방이라는 데를 가셨다고 했다. 읍내에 유일한 사교장이었던 그곳에서 쓰디쓴 커피라는 차를 마시며 남정네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때, 한 남자가 들어왔다.
학생들의 지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시절.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학생들, 게다가 대학생들에게 무어라 꾸짖는 사람은 드물었다. 포마드를 잔뜩 발라 이마가 훤히 보이도록 머리를 넘긴 대학생은 딱 달라붙는 슈트와 바지를 입고 대낮에 볼 빨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전 처음 본 서울에서 온 대학생은 심하게 달라붙는 옷을 위아래로 입었으며, 낮술을 마셨고, 가장 건방진 자세로 앉아 담배를 그야말로 꼬나물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신기했다고 했다.
다음 날, 다시 그 다방에 갔을 때, 어제 본 그가 다가와 ‘시간 있으시면 커피나 한잔할 수 있겠어요?’라고 했다. 상투적인 추파를 던지며 그는 자신은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 말에 기가 막히고 말문도 같이 막혔다고 했다. 그래도 그가 어느 집 아들인지 정도는 알아두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가에 중매가 들어왔다. 마을에서 대소사가 생기면 글씨를 써달라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가는 두 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글씨를 곱게 쓰고 다른 분은 힘이 넘쳤다. 예쁘게 쓰는 분은 친할아버지이고 강렬하게 쓰는 분은 외할아버지다. 평소에 안면이 없을 리 없지만 그리 서로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면장과 우체국장은 딱히 친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외할아버지는 여식이 나이가 어려 곤란하다며 중매쟁이를 돌려보냈다.
어느새 그는 달아올랐고 한 가지 계략을 짰다. 그녀의 집 앞에 항상 검은색인 지프가 서 있었고 그녀는 납치됐다. 그게 보쌈인지, 사랑의 도주인지. 어머니는 서귀포의 한 친구 집에 이틀간 갇혀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마을에서 처녀가 사라졌다, 왔으니 그대로 게임이 끝나버렸다. 열아홉 처녀는 그렇게 시집갔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녀도 싫지는 않았다고.
그 후로 그녀는 십 년이 지나 앞으로 여자아이 둘을 낳고 셋째를 낳는데 아무래도 또 여자아이 같아서 소리도 크게 못 질렀다고 한다. 맏며느리로 들어가서 내리 딸 셋이면 이를 어쩌랴. 그런데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시어머니가 손을 뿌리치며 ‘소나이(남자)여!’ 하고 소리쳤다.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