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와 신호등을 조심하세요.
제주의 색은 검은 현무암과 같은 색의 흙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지는 투명에 가까운 흰색에서 초록으로 또는 그 반대로 이어지는 그러데이션이다. 화창한 날에 해안을 끼고 달리는 것도 좋겠지만, 거대한 해무가 서서히 섬을 덮어올 때 인적 없는 산간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시기가 중요한데 이미 안개가 한라산을 다 덮어버린 후에는 별 재미가 없다. 해무가 산 위에서 서서히 아래로 내려올 즈음이 좋다. 시내에서 산간도로로 올라가고 있으면 마침내 돌고래 같은 안개 조각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다 완전히 하얀 안개에 갇히면 시계는 5m 남짓이고 나는 천지사방을 구별할 수 없게 되면서 중력이 단단히 나를 땅에 내려놓고 있음에 그나마 감사하게 된다. 이 휘황한 공간 속에 있다는 것이 마치 시공이라도 초월한 양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이것이 변태스럽다면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았으니 못 본 채 해주기 바란다. 사실 산 정상에 부러 오르려는 사람들이 나는 더 이상해 보인다. 이것도 내가 이상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 해 본 사람이 있으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볼 만 하다. 속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와 같은 걸 본다면 정말 좋았다고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우리는 함께 안개 애호가가 되는 것이다.
제주의 도로는 승차감이 좋지만, 직선도로보다는 구불구불한 도로가 많다. 그리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는 마을 안길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50㎞ 속도 제한이 되고 마을마다 있는 초등학교 앞은 여지없이 30㎞ 속도 제한이 있다. 70㎞ 속도로 달리다 갑자기 과속 카메라를 봐서 당황할 수도 있다.
작년에 제주에는 5만 대가 넘는 차량이 늘었다. 매일 다니는 도로의 정체는 일상이 되었고 앞뒤 좌우로 ‘하’, ‘허’, ‘호’ 번호판에 둘러싸이는 것도 더는 특이한 일이 아니다. 면세점 앞에 늘어선 관광버스들이 한쪽 차로를 완전히 점유하는 것도 다반사다.
차량이 많아지면 사고가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다. 인구가 늘어나면 범죄가 더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같다. 얼마 전 자동차 사고를 냈는데 운전한 이후로 가장 큰 사고였다. 앞서 있던 승합차와 함께 신호를 받고 좌회전 했고 잠시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고 다시 앞을 봤는데 앞서 달리던 승합차가 서 있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돌렸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서 앞선 차량의 뒤범퍼를 들이받았다. 내 잘못이다.
그런데 그 차는 왜 좌회전 하자마자 섰을까? 수십 년 다닌 그 길에 새로 신호등이 생겼다. 양쪽으로 렌터카 주차장이 있어서 새로 설치한 듯 한데 좌회전 하고 나면 바로 그 신호등이 있기 때문에 차량들이 미처 교차로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 신호에 걸릴 때가 있다. 짐작 건데 내가 들이받은 그 승합차도 그래서 급제동을 한 것 같다. 내 잘못은 명백하지만, 원활한 차량 흐름과 사고 방지 목적으로 설치했을 신호등이 되려 사고를 유발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제주 여행에서 운전에 관한 글을 읽을 때가 있다. 답글의 내용은 대부분 제주 사람들의 거친 운전 탓을 한다. 반대로 제주 사람들은 렌터카들의 과속, 저속 그리고 미숙 운전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늘어나는 차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 인프라의 문제가 있다.
자동차 제조사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들에게 미안해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차량 결함으로 사고가 났다면 유감 표시 정도로는 턱도 없다. 도로가 사고를 유발했다면 마찬가지 경우가 된다.
이미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 위로 50㎞ 속도 제한이 없는 도로가 건설되었고 확장 예정인 곳도 있다. 바로 어제 그 도로를 달리다 노루 한 마리가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새끼 노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 큰 노루도 아니었다. 노루는 몇 번 차에 치일 뻔 하다 넘어지고 우왕좌왕하다가 내 차 앞에서 반대편 차로로 높은 중앙 분리대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반대편에서도 차들은 급정거를 하느라 얽히고설켰다. 작은 소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노루의 눈은 당혹스러운 제주 사람들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노루를 욕하겠지만, 그래 봤자다. 노루는 인간이든 뭐든 탓하지도 않을 테고 정작 잘못은 노루에게 있지도 않다. 공존은 누구에게나,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이 섬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
타이틀 사진을 http://ihope9.blog.me/220622094767에서 허락을 받고 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