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휘어짐과 시간의 왜곡
애초에 내 예상은 이랬다. 대부분 연발하지는 않아도 연착할 것이다. 특히 저가 항공사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나. 그래서 예정 도착 시각인 새벽 한 시 삼십 분보다는 조금 더 늦게 아마 새벽 두 시쯤 도착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새벽에 많은 이미그레이션 직원들은 퇴근해 버렸을 테고 순번상 새벽 근무를 해야 하는 아주 적은 수의 직원들이 퉁명스럽고 졸린 눈빛으로 세계 각국에서 오는 여행객들의 여권을 들춰보고 사진을 찍어야 하니 뒤로 물러나 바닥에 발을 맞추라고 할 것이다. 내 경험으론 이게 보통 한 시간쯤 걸린다. 그러면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해서 배낭을 찾아 밖으로 나가면 새벽 세 시쯤 될 것이다. 그러면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돈 받고 파는 스타벅스 옆에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그냥 알려주던 로컬 브랜드 커피숍에 앉아 두 시간만 기다리면 국내선 전용 공항인 돈므앙으로 가는 첫 셔틀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셔틀버스는 사십 분만에 돈므앙 공항에 나를 내려줄 것이며, 여유 있게 일곱 시 발 치앙마이행 녹에어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물론 이런 장황하고 빈틈없는 예상은 어긋나기 마련이다. 실제로는 제주 공항에서 아홉 시 십 분 출발 예정이었던 이스타항공 ZE551편은 아주 오랫동안 활주로에서 대기 중이었다가 아홉 시 삼십 칠분이 되어서야 이륙했으나 기장이 무슨 이유에선지 열심히 엑셀러레이터를 밟아서 이십 분이나 빨리 쑤완나품미 공항에 도착했다. 항상 세계 각국의 가지각색의 여행자들로 북적여야 하는 공항 이미그레이션에는 그야말로 딱 알맞은 만큼의 여행객만 있어서 이미그레이션 창구를 골라서 들어갈 만큼 한산했다. 그렇게 비행기가 도착할 시간에 나는 이미 배낭을 둘러매고 모든 절차를 끝내고 첫 버스가 운행되는 새벽 다섯 시까지 네 시간 삼십 분이 남겨진 시간에 도착 출구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새벽의 쑤완나품미 공항에는 흐느적거리는 달리의 『기억의 지속』 안의 시계들처럼 시간을 죽여야 하는 여행자들이 흩어져있었다. 공간 가속으로 시간은 왜곡되고 중력의 압박은 더 심해졌다. 그들 사이에 빈자리를 발견하고 비슷한 포즈로 누웠다가 식당 앞의 메뉴를 들춰보다가 문득 추워서 밖으로 나왔다. 습한 이국의 공기가 느껴졌다. 한숨도 자지 못해 배낭끈을 잡은 손이 파리하게 떨렸다.
사십 분이 걸린다던 셔틀버스는 한 시간을 달려 돈므앙 공항에 도착했다. 녹에어 비행기는 깨끗했고 이스타 항공처럼 좌석에 달린 식탁 트레이가 망가져 있지도 않았다. 헤드뱅잉을 하는 걸 느꼈지만, 어쨌든 드디어 나는 잠에 들었다.
배낭을 찾고 밖으로 나오자 햇살에 눈이 부셨다. 어젯밤 제주의 나는 오늘 아침 목적지에 도착해 해를 맞고 있다. 얼굴이 부어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 뒤에서 ‘지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라찬. 벌써 삼 년째 매년 만나는 태국 친구. 내가 아는 유일한 태국 히피다. 더 마르고 어깨는 더 좁아진 것 같다. 그렇게 일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공항에 마중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날 기다려 준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그리고 로사를 만났다. 역시 오랜만이다. 어느 날 한국에서 사라져버렸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하루 150바트(약 5000원)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 두었다. 소박한 태국식 건물 2층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이 나무 바닥에 매트리스가 놓여있었다. 사방으로 난 창문으로 열대의 나무들이 보였다. 손님은 나 혼자였고 침대에 누워서도 창밖으로 코코넛 나무가 보였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치앙마이의 하늘은 이즈음이 최고인 것 같다. 마치 생의 마지막을 기억하려는 듯 그 풍경을 각인하다 잠이 들었다.
지난 밤 집을 나서면서 보았던 익숙한 것들이 떠올랐다. 그리움은 떠난 직후나 떠난 지 아주 오래되었을 때 가장 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