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의 의무
태국 친구 라찬은 목각을 하는 친구다. 이곳저곳에서 나무를 주워다가 밑그림을 그리고 칼로 파서 채색을 한다. 거리에 좌판을 차리고 작업을 하면서 손님을 기다리는데··· 보고 있자면 공치는 날이 많아 한심스럽기도 하고 걱정되기까지 하지만 가끔 잘 팔리는 날도 있다. 꽤 비싼 값을 내고 덥석 그 가치를 제대로 쳐주는 서양인이 나타나는 날도 있고 다른 태국의 예술가들처럼 외국에서 대량 예약을 받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성실하게 기일에 맞춰 해 주는 경우는 없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닌 예술가의 영감 운운하면서 느리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아예 시작도 안 할 때도 있다.
라찬의 작업장은 대개 숲 속이고 그곳에는 달랑 해먹 하나가 걸려 있다. 전에는 선풍기도 있었는데 이번엔 그런 건 전혀 없다. 강렬한 태양보다 더 괴로운 습도를 온전히 몸으로 이겨내야 한다. 전에 커피숍을 한 적이 있어서 항상 커피 드리퍼가 있는데 종이필터를 몇 번이나 재활용해서 향 따위는 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히피라는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작업하다 뭔가 영감을 얻었다는 듯이 기타를 친다. 옛날 태국 노래를 치기도 하고 자신이 어디선가 영감을 얻어 작곡한 것을 연주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악보를 볼 줄 모르면서 기타를 배운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태국 전통 가요는 마치 우리 트로트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태국 동북부 예전 캄보디아 땅이었던 이싼 지역 출신인 라찬의 또 다른 특기는 요리다. 이싼 요리가 맛있기도 한데 특히 라찬은 솜씨가 좋다. 어쩌다 작품이 팔려 돈이 생기면 여지없이 음식 재료를 사는데 다 써버리고 주변 친구들을 다 먹인다. 오랜만에 그의 음식을 먹었다. 집 주변의 잡풀을 뜯어다 끓이는 것 같더니 국물이 제대로 깊은 맛이 난다.
태국에서는 왕이 인기가 좋기도 하거니와 왕을 비하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왕에 관해 물으면 대부분 ‘그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라찬은 내가 아는 태국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왕가를 비판하는 사람이다. 여러 혼란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는 태국에서는 군대에 의한 쿠데타가 합법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은 혼란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저번에는 그러지 않고 정권을 잡은 모양이다. 쿠데타를 반대하는 일은 왕가를 반대하는 것보다는 죄가 덜 해서 간혹 이를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라찬도 그렇다. 저항하는 것은 히피의 의무다. 그는 히피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
태국의 감성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것들에서 드러난다. 나는 그게 그다지 깊은 맛이 나지는 않지만 얇고 가볍고 흥겨운 기분이 든다. 태국은 예술가 천국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포토크래퍼니 페인터니 뮤지션 등등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다 처음 보는 한 태국 친구가 자기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태국엔 예술가가 너무 많다면서.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태국 사람들이 보기에도 태국은 온통 예술가 천지인 것 같다.
농촌 지역에서 볏모작을 몇 번이나 하냐고 물었더니 세 번은 가능하지만 한 번만 하는 지역이 많다고 했다. 삼모작을 해서 많이 생산해봐야 정부에서 수매해주는 일도 없고 일모작으로 충분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부러 재배하지 않아도 널린 야채가 있고 의식주에서 나름대로 자유로워진 이들은 예술을 택했다. 그런 것 같다.
숲이라기보다는 정글이라고 해야 어울릴 이 도시 외곽의 은밀한 아지트에서 식사가 끝난 후에 맥주 몇 병을 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일부러 내어놓은 면세점 담배를 슬그머니 한 대씩 빼 물고 품평을 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 필터 제품 담배는 피우지 못한다. 얇은 바나나 잎사귀에 터키쉬 타바코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 연한 갈색 연초를 말아 피운다.
술 심부름을 하는 제일 나이 어린 옆집 식당 총각은 귀찮아하면서도 곧잘 맥주를 사다 날랐다. 라찬은 술안주로 콩을 한 냄비 삶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