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지완 Jan 26. 2016

배낭의 정령

이번 여행에는 두 개의 배낭을 가지고 갔는데 작은 배낭은 랩탑도 넣고 카메라나 여권 같은 것을 넣어 기내 가방으로도 쓴다. 큰 배낭은 구입할 때는 가장 큰 용량인 70리터 배낭인데 헤드를 늘이면 85리터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작은 배낭은 8리터의 작은 크기다. 큰 배낭 안에는 친구에게서 부탁 받은 유기농 농산물 분말들도 들어 있었고 이런저런 선물을 빼고 나니 거의 텅 비었다. 작은 배낭은 기내 가방에서 일상 용도로 임무를 바꿔 요즘도 여전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다.


작은 배낭을 매고 올레길을 걸었다. 제주는 고향이라 올레길 표시를 따라 걷다 쓸데 없이 왜 오름을 오르라는 것이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올라가서는 ‘이 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었잖아.’라며 땀을 훔치고는 눈 앞에 나타난 익숙한 풍경에 여러번 가슴이 먹먹해 지는 걸 느꼈다. 그러다 바닷가를 지나칠 때면 그 갯내음이, 비린내 나는 바닷가에는 가지도 말라던 집안 어른들의 말씀에도 그렇게 나가 놀았던 그 갯가의 냄새가 내 어린 시절을 한꺼번에 회상하게 하는 향기로 다가왔다.


큰 배낭은 가득 채우면 20Kg 정도 된다. 메이저 항공사들은 대부분 20Kg까지 수하물을 위탁할 수 있는데 저가 항공사가 생기면서 무료 수하물이 있더라도 15Kg인 경우가 많아졌다. 저가 항공사의 위탁 수하물 옵션을 사면 저가라는 장점이 무색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아 이 배낭을 가득 채우고 저가 항공사의 비행기를 탔다가는 당혹스러운 일을 겪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배낭을 매고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트래킹 전용 배낭이라는 특성상 좌우로는 좁고 위아래는 길어 머리 위로 배낭의 윗부분이 보이는데 여기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옷과 침낭과 숙소에서 신을 슬리퍼와 숟가락, 젓가락까지 챙겼고 그위에 레인커버를 씌우니 뒤에서 보면 딱 다리만 보여서 뒤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어 보여줬었다. 무게를 재어 보면 22Kg정도 였는데 바늘 하나라도 버릴께 있다면 찾아서 버리고 싶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하루에 평균 25Km씩 34일간 걸었다. 시속 4Km를 예상했지만 일주일이 지날때까지 시간 당 3Km를 조금 넘겼다. 그래서 항상 출발은 이른 편이지만 도착은 맨 마지막이었고 그날 머물 마을에 도착해 보면 제일 나쁜 자리에 내 매트리스가 남겨져 있었고 때론 그마저 없었다. 그러면 공원 벤치에서 노숙을 하거나 다음 마을까지 가야했다. 그래도 그냥 그럴려니 했다. 걸음은 차츰 걸어지는 것이고 부러 빨리 걷지 않게 되었다. 다리는 자연스럽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도 교차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허리 위 상체는 빙빙 돌려 구경도 하고 안정적으로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었다. 어쩌면 글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힘들었다. 새벽 여섯 시쯤 출발해서 오후 한 시쯤 그날 묵을 숙소를 잡는다면 그날은 평온한 날이겠지만 마을 간 거리가 멀어 오후 서너 시까지 걸어야 할 때면 이 배낭의 어깨끈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배낭이 ‘나 힘들어. 그만 가고 쉬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배낭을 매고 우연히 코카서스 산맥을 올랐고 민주화 시위와 쿠데타로 혼란스러운 카이로 시내를 오래 걸었다. 실탄을 장착한 군인들과 장갑차, 탱크 사이를 걸을 때면 마치 인류 종말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치하다가도 군인들과 시민들은 광장 뒷골목의 찻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하며 물담배를 피웠다. 뜻하지 않게 뭄베이의 노랗고 작은 택시는 이 배낭이 들어가지 않아 지붕에 묶여 나와 함께 시내 구경을 했다. 인도 기차에서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어두운 밤의 흑해를 따라 걷다 새벽을 함께 맞기도 했다.


배낭에 무슨 정령 따위가 있겠냐마는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고 내 몸에 딱 들어 맞는다. 이제는 좀 더 작은 게 좋지 않겠냐고 하지만, 매어 보면 등에 업은 애인마냥 찰싹 달라붙고 손을 놓아도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으며, 등에서 떨어져서 짐칸에 실릴 때면 슬퍼보이고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를 만날 때면 기뻐보인다.


한달을 지낼 방을 구하고, 짐을 풀었다. 이제 커다란 배낭은 구석에 놓여 안식처를 찾은 듯 편안해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가 천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