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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완 Dec 13. 2015

큰누나 시집 가던 날

2/3 : 가문잔치

늦은 밤까지 계속되던 넉둥배기 판에 혼주가 불려 나가 애써 돈을 잃어주고 나서도 함성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돼지고기가 들어있는 솥은 밤을 새워 불이 꺼지지 않았고 아낙네들은 그 곁에서 쪽잠을 잤다. 날이 밝고 정오가 되기 전에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 손님 받는 날을 가문 잔치라고 하는데 정작 결혼식 당일보다 이날이 더 성황이다.


지난밤에 몰래 친구들과 술을 가져다 구석에서 마셨다. 날이 날인만큼 늦은 밤 구석에서 마시는 걸 어른들이 나무라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아침 식사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옆집 담을 허무는 것이다. 집 한 채로는 손님을 다 받을 수 없으니 옆집과 뒷집의 담을 허물었다. 아시다시피 제주의 돌담은 폭풍우나 어떤 바람에도 무너지는 일이 없다. 하지만 사람이 밀면 쉽게 허물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옆과 뒷집의 경계를 허물었다.


고기를 관장하는 고기 도감 하르방과 술을 관장하는 술 도감 하르방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다. 고기 한 접시와 술 석 잔만 허용되는 법을 알면서도 옆에서 도와주기도 하고 아부도 하면서 고기 한 점에 술 한 잔 더 마시려는 사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부엌 주위에 쪼그려 앉아 뭔가 떨어지기라도 바라는 눈치였다. 돼지 일곱 마리를 잡아도 그렇게 항상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 


소주가 흔해지면서 술 도감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전통 혼례를 하면 고기 도감이 있다. 고기 도감 하르방은 맛있는 부위는 따로 관리해서 중요한 손님(읍장님이나 교장 선생님 같은)이 오면 혼주의 요청으로 내주었다. 일반적으로는 살코기 한 점에 비계 두 점의 비율이었지만 그 좋은 고기는 그렇지 않았다.


몇몇 반찬만 빼고는 잔치 음식은 일인분으로 분배되었다. 그걸 ‘반’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오면 ‘반’은 각자 제공됐다. 아이가 먹다 남긴 음식은 싸서 집으로 가져갔다. ‘반’은 하나의 접시에는 각종 나물이며 떡이 한 가지씩 올려져 있었고 다른 ‘고기 반’ 접시에는 돼지고기 석 점 그리고 밥과 국이 따로 나왔다. 밥은 특별한 날엔 하얀 쌀밥이었다. 쌀이 생산되지 않던 제주에서는 하얀 쌀밥을 ‘곤밥’이라고 불렀다. ‘고운 밥’이라는 뜻인 것 같다. 곤밥과 가장 중요한 국은 그 잔칫집의 위상을 말해준다. 어떤 국을 끓였느냐에 따라 그 잔치를 비싸게 치렀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도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자기 결혼식에서 성게국을 했다는 둥 하는 것을 자랑처럼 떠들어대기도 한다. 대게 생선을 넣은 미역국이다. 잘 차리면 성게나 어쩌다 쇠고깃국을 만난 적도 있다. 


어제 먹었던 몸국은 손님들에게는 대접하지 않는다. 같이 일을 하는 일꾼들, 삼촌들의 몫이다. 손님들에게는 더 특별한 국을 준비해야 했다. 몸국은 시대에 따라 밀가루 면이 흔해지자 국수를 해 먹기 시작했다. 이건 지금의 고기국수가 되었다. 몸국의 몸 대신 제주 고사리를 넣어 죽처럼 오랜 시간 끓여내면 제주식 육개장이다. 가끔 육지 손님들이 식당에서 육개장을 주문하고서는 자신이 생각하던 음식이 아니라 당혹해 하는 모습을 본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신랑 측 대표가 신부 측을 함을 들고 방문한다. 오징어로 가면을 만들어 매고 내미는 발자국마다 돈을 까는 것을 TV에서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한다. 신기했다. 제주는 친구가 아닌 신랑 측 대표가 함을 들고 신부 측을 방문한다. 함에는 돈 봉투도 들어있는데 보통 따로 봉투를 준비했다가 받은 돈의 반을 신랑 측 대표에게 돌려준다. 


함을 줄 때 신랑 친구들도 같이 오는데 신부측에는 물론 신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 특이한 풍속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부신랑, 부신부가 있다는 것인데. 신랑은 친구 중에서 한 명을 부신랑으로 임명하고, 신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통 가장 친한 친구를 지명하기 때문에 부신랑으로 지명되면 자랑스러워 한다. 


부신랑, 부신부는 신랑, 신부가 해야 할 귀찮은 일들을 처리한다. 여러 가지 준비나 예약이나 세세한 일들. 친구들끼리의 피로연 계획이나 잔치에 찾아온 친구들의 대접 등등. 그래서 부신랑, 부신부는 잔치 전부터 자주 만나야 하고 그러다 부신랑, 부신부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공식적으로는 결혼식 전날, 손님 받는 날이 신랑, 신부 친구들끼리 처음 만나는 날이다. 함을 주러 신붓집을 방문하면 부신부와 친구들은 ‘손수건’을 신랑 친구들에게 ‘판다’. 신랑 친구들에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손수건을 비싸게 팔았다. 술도 권하고 안주도 권하고 노래하라면 노래도 하고 춤도 추더라. 지금 생각해도 이 풍속은 귀엽기 그지없다. 어느 나라, 어떤 지역에서도 본 적이 없다. 


결혼식을 마치면 신랑은 수고한 부신랑 친구에게 양복 한 벌을 선물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넉둥배기 판은 시작되었고 어제보다 판돈은 더 커졌다. 전문적으로 이런 판만 돌아다니는 걸 직업으로 한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워낙 마을에 대소사가 많다 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늦은 밤에도 계속해서 판돈은 오가고 중간에서 심판 겸 윷을 놓는 사람이 흥정과 게임을 만든다. 결국은 가장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그 심판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는 없다. 윷도 잘 놓을 줄 알아야겠지만, 힘도 세야 중간에 앉아 판을 관장할 수 있다. 


밤이 늦으면 기혼자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총각들만 남는다. 십 대부터 오십 대 총각들까지. 간혹 총각이라고 말하기에는 미안한 어르신들도 있다. 슬슬 판이 끝나가지 않나 하는 순간 넉둥배기 판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면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고기까지 있으니 넉둥배기 판 곁에 술상이 제법 화려하다. 돼지고기와 김치, 떡이나 전이다. 판이 끝나고 돈 배분이 시작되면 술상 옆에서 술이나 마시던 이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천원, 이천 원씩 뜯어낸다. 네가 던질 때 소리쳤다고 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교대로 다 오고 가고 나서야, 마을 아주머니들이 손에 ‘사은품’이라는 명목의 수건이나 비누, 고무신 같은 것을 들고 돌아가고 나서야 가문 잔치가 끝난다. 큰누나는 작은 누나와 신부방에 있다. 방에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어쩌다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나오면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워 볼이 빨개졌다. 작은 누나는 우리 남매 중에 가장 용감했지만, 그날은 훌쩍훌쩍 울었다. 신부보다 더 울었다. 다음 날. 큰 누나가 신랑차에 타고 시집으로 가는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울었다. 몇 년 후에 작은 누나는 아예 서울로 시집 가 버렸으면서. 옆 마을로 시집가는 언니는 그렇게 영영 떠나버리는 것 같았나 보다. 막내인 나도 그 때는 찔끔 눈물을 흘렸나 말았나.


돌아와서 뒷정리를 하는대도 며칠이나 걸릴 것 같다. 친구들과 무너뜨린 돌담을 장난스레 다시 쌓아보지만 하는 놈이나 구경하는 놈이나 안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돌담은 아무나 쌓아지지 않는다. 제주 마을에는 한 사람씩 돌담 쌓는 장인이 있어 그가 오고 나서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걸 지켜봤다. 돌을 들어 올려 빙빙 돌려 착착 쌓아가는 것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고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비법을 묻자 그는 암수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돌에 암컷, 수컷이 있다니. 아무튼, 그는 마치 돌이 원래 있던 자리가 거기였다는 듯 그렇게 번듯한 돌담을 쌓았다. 사람들은 간혹 돌담 사이에 시멘트를 바르거나 했지만, 그것보다 더 튼튼해 보였다. 돌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끈끈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틈새로 바람이 통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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