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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완 Dec 18. 2015

제주에서 우리가 하는 말들

바다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공항을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바다가 보인다. 밥 딜런의 곡을 영화로 만든 ‘노킹 온 해븐스 도어 Knockin' On Heaven's Door’의 마지막 장면처럼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깊은 파란색의 바다가 ‘등장’한다. 계속 직진하면 거대한 심연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아 첫 번째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옥빛 바다에 감탄이 이어진다.

 

암연한 나날에는 자주 이곳에 왔었다. 일을 마치고 혼자 저녁을 먹고 나면 그냥 잠자리에 들기도 그렇다고 누가 만나주는 이도 없었다. 조금 더 가면 지금은 드라이브인 커피숍이 있는 바다와 가까운 곳이 있다. 이제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커피를 사서 지나쳐 버리는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돌아가곤 했다. 그야말로 하염없었다. 용담 해안도로에서 가장 파도가 센 곳이라 포말은 하늘을 덮어 솟구치곤 했다.


섬머리라는 도두(길 道 머리 頭)는 제주 일주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오래전부터 해 왔었나 보다. 도두봉에는 학생들이나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단체 관광객들이 항상 보인다. 보통 여행의 마지막 날 넉넉하게 잡아놓은 일정 때문에 너무 이른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게 되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 같다. 우리에서 풀려나온 양 떼들처럼 도두봉을 기웃거리고 바다를 바라보다 휘 버스를 타고 사라지지만 이내 다른 버스들이 도착한다.


공항 옆 산책길에 비행기 이착륙이 가장 많은 오후 다섯 시쯤 가면 항공기들이 줄지어 내려앉는 광경을 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비행기 배꼽을 보여주려 한다거나 사진가들이 좋아하기도 하고 알랭 드 보통 처럼 공항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가볼 만 하다.


도두봉을 지나면 이호 태우 해변이다. 그 사이에 있는 초등학교 이름은 ‘도리’다. 뭔가 귀엽지 않나. 도리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무언가 물으면 학생들은 ‘도리도리’할 것 같다. 같은 작명으로 곽지와 금능에는 ‘곽금’초등학교가 있고, 이런 식의 교명은 다른 곳도 있다. 


교가는 대부분 ‘한라산 줄기 뻗어 **봉 되고’로 시작한다.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없었을 때는 일주도로라 불리는 도로로 섬을 빙 둘러 제주시에 와야 했다. 하귀가 보이면 이제 제주시에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었다. 


애월읍의 소길리는 ‘쇠질’이라고 했던 소가 다니는 작은 길(질)이 있던 동네라고 했다. 그 유명한 소길댁 덕분에 더 유명해 지기도 했고 자꾸만 유명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는다. 영화배우나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가수나 작곡가 그리고 요리사들. 


소길리의 장필순 씨는 먼저 온 윤영배 씨 덕분에 왔다고 들었다. 윤영배 씨네 놀러갔다가 장필순 씨가 오로지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 준 적이 있다. Carol King의 You’ve got a friend. 필순 씨는 잊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모두 잠든 이른 새벽에 거의 무릎이 맞닿을 만한 거리에서 그 노래를 내게 불러줬다. 이런 쪽에는 무식한 과학자라 윤영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자전거를 좋아해서 방에 들어가서 타이츠를 입고 나와서 기타 치며 노래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웃겨서 코미디언인가, 싶었다.


요즘 제주도에서 기분 좋은 일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멀었던’ 사람들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음반으로만 들었던 임인건 씨의 연주를 들으며 입장료만 내면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와인과 맛있는 치아바타도 먹을 수 있다. 재즈 애호가인 카페 주인장이 매번 치아바타를 후원한단다.


처음 서울에서 라디오를 들었을 때, 마치 옆에서 진행하는 듯 가깝게 들렸다. 정말이다. 아무래도 제주에서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는데 황송하게도 제주 공연도 아니고 이웃에 살면서 직접 라이브로 들려주시니. 내일도 임임건의 ‘강선생 블루스’를 들으며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 갈다.


고내 포구를 지나면 이제는 유명해진 한담과 곽지 해변이 있다. 어린 시절 의무감에 아버지가 데리고 갔던 곽지 해변은 ‘과물’이라는 물이 있어 좋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아버지는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고 과물에 앉아 수박을 드셨다.


협재는 아름다운 백사장이다. 대부분 현무암의 검은 모래나 황갈색의 해변이 많은데 산호초와 조개가 잘게 갈린 이 해변은 눈부시다. 어른들은 ‘협재 처녀들은 모래 한 말은 먹어야 시집간다’고 하셨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날려 집안까지 들어오니 알게 모르게 먹게 된다는 것이고 먹은 모래가 한 말은 되어야 시집갈 나이가 된다는 뜻이다. 


어른들은 이런저런 너스레를 떠는 일이 많다. 제사나 명절에 어른들이 모이면 저마다 자기 동네에서 보는 한라산이 제일이라고 자랑하신다. 어디나 바라보면 바다가 있고 그 반대편은 한라산이니. 하지만 보는 곳마다 풍경은 달라서 그런 말들을 하신다. 


“겅해도(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보는 한라산이 젤로 멋져.”

“뭐센 고람수꽈(뭐라고 말합니까). 서귀포에서 봐사주(봐야지).”

“거 뭔 말들이라. 시(제주시)에서 보민(보면) 야. 참 훤허게 보이매.”


같은 이유로 제주 사람들과 약속 장소를 잡다 보면 ‘그 한라산 방향으로’, ‘바당 쪽으로’라거나 ‘동쪽으로, 서쪽으로’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섬 가운데 한라산이 있으니 항상 그것이 중심이 된다.

협재 해변의 맞은편 비양도는 ‘해가 날아와서 섬’이 됐다고 한다. 비양도는 우도에도 있는데 우도 사람들은 ‘동비양도, 서비양도’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찾아보니 고려 때 지진으로 생긴 섬이라고 하니 오래된 섬은 아니다. 


바다를 따라 계속 가면 고산이고 제주에서 가장 넓은 땅이 나온다. 이걸 평야라고 불렀지만 육지의 평야를 본 후에 계속 그렇게 불러도 될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가장 큰 농업 지대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고산에서 대정으로 이어지는 너른 땅은 제주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동쪽은 개간이 힘들었지만, 이 서남쪽은 그보다 농사짓기에 편했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제주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금도 오사카의 한인 마을에는 제주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많은 동쪽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서쪽보다 농사짓기가 만만치 않아서였던 것 같다. 양석일의 소설을 영화화한  ‘피와 뼈(2004)’의 감독 최양일은 제주에서 후쿠오카로 향하는 배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한 김준평을 보고 어쩌면 내 외할아버지와 똑같은지 몇 번이나 그 영화를 봤다. 김준평의 아들로 출연한 오다기리 조마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인정하지 않은 큰외삼촌과 상황이 닮아서 놀랐다. 영화 속의 김준평처럼 고향에도 어묵 공장이 있었다.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어묵공장은 폭력이 그칠 줄 몰랐고 더럽고 돈은 사장만 벌었다. 


이 영화가 내게는 폭력을 일삼는 비정하고 야비한 사내에 관한 것이 아닌 그 시대의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여졌다. 김준평은 그 시대를 혼자서 살아야 했다. 혈혈단신 일본에 갔어야 했고 항상 싸우고 치열했어야 했다. 시대 상황은 남과 북, 한쪽을 선택해야 했고 대를 잇겠다는 의지의 소산인 어린 아들을 옆에 두고 혼자서 죽어가야 했다. 


의자 마을 낙천리와 탐라표류기가 있는 저지, 그리고 무릉리가 있다. 도원은 어디 가고 무릉만 남았지만, 햇빛 좋은 날에는 천국 같은 기분이 드는 마을이다. 그리고 모슬포. 여러 지명과 마찬가지로 본뜰 모摹에 큰 거문고 슬瑟자의 한자 음차를 했는데 ‘모살(모래의 제주어)개’를 모슬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큰 거문고 슬에는 다른 뜻으로 ‘차고 바람이 사납다’라는 뜻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차고 바람이 사납기로 모슬포만 한 데는 없다.


가파도는 ‘파도가 아름다운 섬’. 마라도는 ‘말이 아름다운 섬’이라는 한자지만 원래 있던 이름을 역시 음차한 거라고 한다. 원래는 가오리(가파리)를 닮아서라고도 하고 섬이 낮아 파도가 덮어서 가파도라고 했다는 등의 설이 있다. 마라도는 그런 설조차 없는 것 같다.


해녀들이 물질하러 마라도에 갔는데 그만 풍랑을 맞아 모슬포로 돌아와야 하는데 태우러 온 배에 자리가 부족했다고 한다. 꼭 돌아오마고 약속하고 제일 나이 어린 해녀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그 어린 해녀는 본섬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그대로 돌이 되었다고 한다. 우연하게도 그 돌이 되어버린 해녀 바위에서 바라보는 제주도는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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