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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완 Jan 03. 2016

이방인

낯선 고향

지난주에 임인건 씨의 공연에 갔다. 그는 지난 일 년간 제주의 한 카페에서 한 달에 한 번 공연을 하고 음반을 내기도 했다. 다시 일 년이 지났고 아마도 카페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그곳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원술 씨의 콘트라베이스와의 듀오였고 초대 가수로 조정희 씨가 왔다. ‘하도리 가는 길’이나 ‘서울 하늘’, ‘제주 하늘’등의 곡을 나도 이 카페에서 처음 들었었다. 제주에 살며 제주의 길과 하늘을 노래하고 연주하고 즐거워한다. ‘그리움’은 ‘서울 하늘’에서도 ‘제주 하늘’에서도 들리는데 그 무게는 한층 다르다. 그는 제주의 리듬을 만드는게 꿈이라고 말했다.


Play Bill Evans라는 음반을 한 장 사서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빌 에반스 풍의 피아노 곡들이고 조정희 씨가 노래하고 이원술 씨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한 음반이다.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가 시작됐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제주 토박이였다. 다른 분들은 이름하여 ‘이주민’들이다. “어? 나만 제주 토박인가?” 했더니, 아내가 “이주민들은 이주민들끼리 있어야 재미있죠.”라고 했다.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다. 아내도 이주민이기는 한데. 부산댁.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육지’로 전학했다. 거의 어머니를 떠난 적이 없는 꼬마가, 밤새 불이 켜져 있는 여인숙 안내실에서라도 엄마 곁에 있으려던 그 녀석이 덩그러니 혼자 어느 육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가장 큰 고민은 언어였는데, ‘언어 영역’ 말고 진짜 우리가 하는 일상 언어 말이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사투리를 쓰다 선생님께 들키면 30센티 자로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그것도 칠판에 다른 학우가 ‘사투리 쓴 사람’ 밑에 이름이 있으면 분루를 삼키며 벌을 받았다. 무슨 오호 담당제도 아니고.


그런데 분하기 이를 데 없는 건 무엇이 표준말이고 어떤 게 사투리인지 분간 못 하는 데 있다. 손바닥을 맞기 싫은 우리가 결정한 것은 ‘선생님이 쓰는 말’은 ‘표준어’이고, ‘부모님이 쓰는 말’은 사투리라고 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벌 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혹여 교과서에 나오는 말만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철수야. 놀자.’ ‘바둑이도 같이 놀자’. ‘그랬니? 저랬니?’ 식으로 이야기했다가는 실제로는 아무도 안 놀아줄지도 모르지. 이런 TV에서나 나오는 언어를 우리는 ‘곤밥 먹은 말’이라고 했다. ‘곤밥(고운 밥)’은 쌀밥이고 서울에서나 먹는 밥이었다.


아무튼,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표준어’다. 


다시 돌아가서, 경기도에서 중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제주에는 없는 추첨제로 입학해서 다른 학생들끼리도 서로 몰라 그 사납다던 텃세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학급 수는 왜 이리 많은지 4반까지 있는 학교에 다녔는데 전학한 학교는 14반까지 있었다. 금방 친구들도 생기고 몇 가지를 제외하면 다닐 만 했다. 다만 말은 좀 아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란 말을 하도 들어서 그런 면도 있었고 혹시 사투리가 튀어나와 촌놈 취급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삼월의 어느 날. 아마도 십오 일. 민방공 훈련이 시작되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모두 학교 뒷산 소나무 숲으로 가야 했다. 


소나무 숲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은 초기의 진중함을 잃고 조그맣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떤 녀석이 내게 물었다. 


“너 어느 초등학교 나왔어?”

“나 제주도에서 왔는데.”


눈이 커지더니.

“어? 그래? 너 제주도 말 한 번 해봐.”


그들은 분명 제주도 사람을 처음 본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 할 수 없었다. 선생님께 30센티 자로 손바닥을 맞는 일은 이제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건 아니지 않나.


제주도 말을 해보라는 친구들을 자꾸 늘어갔고 나를 아예 둘러싸 추궁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화가 나서 내가 소리치며 한 말은 “안 고라주쿠라!”였다.


“뭐? 뭐라고?” 녀석들이 재차 묻고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킥킥대다 일순간 일그러지며 허연 이를 드러내고 컥컥대며 웃기 시작했다. 급기야 깔깔대더니 몇은 떼구루루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그 옆 다른 나무 밑에 있던 애들이 “쟤 뭐랬어?”하고 묻고는 자기들끼리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삽시간에 퍼지더니 숲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 당황했다. 옆을 봤더니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쳐야 할 선생님마저 웃고 있다. 알고 있나? 모든 이가 웃고 있고 홀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라니.


내가 답답한 건 ‘안 고라주쿠라’는 분명 선생님도 쓰시던 단어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해석하자면 “안 말해줄 테야”가 적당하다. 아이들이 원망스럽진 않았지만, 선생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다. 이후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선생님이 쓰던 말도 표준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말수는 더 줄어들었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다. 명사만 쓰고 사는 거였다.


“아줌마. 요구르트.”

“얼마?”

“100원?”



뭐 이렇게 한 학기를 살아냈다.


그 후로 내 학창시절은 항상 이방인이었다. 서울에서는 ‘제주 아이’였고, 제주에 오면 ‘곤밥 먹은 놈’이었다. 동상이라는 걸 처음 걸렸고 한 달 만에 어머니와의 통화는 한마디도 못 하고 울다 끊었다. 그러다 방학이라고 돌아온 친구에게 처음엔 신기함에 다가섰다가 곧 그들끼리만 놀았다.


이제는 이주민들 사이에 유일한 토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니 이방인은 그들인 아닌 나였다. 천상 팔자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제주에서 21대째 사는 고려 개국 공신의 자손은 카페 주인장의 쓸쓸한 인사를 받으며 먼저 자리를 떴다. 이주민들은 이방인을 끼워주지 않았다.


’고라주쿠라’는 ‘고하다’, ‘고르다’에서 온 옛 한글에 어원이 있는 단어일 것이다. 제주 방언은 80% 정도가 귀양 온 양반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주로 명사에 몽골어와 일본어가 차지하고 있다. 아래아, 여린 히읗 같은 발음도 살아 있는데 알다시피 아래아는 ‘아’와 ‘오’의 중간 발음이다. 이 발음은 북쪽으로 갈수록 ‘오’ 발음에 가까워졌고 남쪽으로는 ‘아’ 발음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제주는 왜 ‘오’ 발음에 가까울까?


이건 조선 초 권문세가들이 당시로써는 대규모 귀양이 이루어질 때, 언어도 함께 섬으로 점프하면서 생긴 것이다. 차근차근 남으로 내려왔다면 ‘아’ 발음에 가깝게 변했겠지만, 섬이라 교류가 쉽지 않았고 귀양 온 양반들의 언어는 그대로 토착화되었다고 한다. 


‘말’을 ‘마ᆞ갈’이라고 한다거나 ‘닭’을 ‘다ᆞ갉’이라고 하는 것 등은 모두 옛한글에서 온 것들이고 제주에서는 ‘오’ 발음에 가깝지만,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이나 가파도에서 보다 완벽한 발음을 들을 수 있다. 물을 입에 물고 ‘흐’ 발음을 하는 듯한 여린 히읗도 들린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날아간다’가 아니고 ‘놜아간다’라고 발음하는 것도 들을 수 있다.


음반이 두 번 돌았다. 빌 에반스의 연주에 가사를 붙인 것은 처음 들었다. 제주의 리듬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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