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했다. 어제의 나는 너무 유치했다.
작년에는 후배가 상무가 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동료가 상무가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이로는 언니지만 우리 회사 경력으로는 후배이고, 사적으로 친한 언니다. 워낙 일에 진심이고,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진심으로 그녀의 진급을 바랐다. 그런데 막상 일이 닥치니 첫 진심 이후의 내맘이 이상했다.
나도 할 땐 열심히 했다. 이 조직에 필요한 기여는 나름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전문성도 갖췄다고, 사내에서 아는 사람은 그걸 알아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언가 보상받지 못한 느낌에 마음 속에 억술함이 가득하다. 올해 상무가 된 언니 탓은 아니다. 그 전 상사의 탓이라면 탓일까. 나와 너무 궁합이 맞지 않는 상사였다. 내 시선에 그리 유능하지도 않은 상사였다. 그래서 나는 종종 무례했다. 후회와 죄책감이 없진 않았다. 그래도 그녀를 존중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여파로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상무님이 있는 것일까.
학교에 다닐 때와 지금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보이지 않는 어느 높은 자리에 자동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자리가 올라가지는 않는다. 문제는 자리가 올라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한 태가 나지도 않는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각설하고, 축하 이후 '상무님'이라는 호칭이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꼭 가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권유에 겁없이 가서 앉아만 있어도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어수선한 회의 전 옆으로 오라는 부름에 옆 사람과 얘기하던 일을 핑계로 못들은 척 했다. 그녀는 아무 죄도 없고, 이 기쁜 소식에 앞서 엄마의 건강 문제로 마음이 많이 무너진 상태인데... 난 너무 유치했다. 내가 힘들 때면 늘 힘이 되어주던 언니인데...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옛말은 이럴 때 하는구나 싶다.
상무 진금으로 선물하려던 만년필이 오늘 마침 도착해서, 예쁜 포장은 안된 상태이지만 그녀의 나리에 놓아둔 채 퇴근했다. 어지간한 일은 티내지 않는 그녀가 내 마음을 이해해줄까. 그녀에게 진심어린 축하와 사과를 전하고 싶지만, 회사 일에는 집중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하면 뭐하나 싶은 생각만 들고, 올해 시도해본 번역일에 집중하고만 싶다. 과감하게 그만두고 새로운 공부에 더 집중해볼까... 내일 아니 몇 년후에 죽는다면 당장 하고 싶은 일이 퇴사인데 뭐가 이렇게 두려운 것일까. 몇 개월전 별 생각없이 시도했던 이직 시험 낙방이 생각난다. 붙어도 두렵고 떨어져도 두려웠던 시험... 생각해보면 나는 진급도 되도 두렵고 안되도 두렵다. 늘 만감이 교차하는 하루하루.. 이런 마음을 이해라는 사람들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