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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Jun 19. 2016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에 대하여..

자오팅양/레지드브레의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를 읽고...

수년전 베스트셀러로 유명했던 체 게바라는 최근까지 살아있던 인물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그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끈 레지 드브레라는 프랑스 혁명가가 이 책의 주인공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프랑스 트레이라는 지역에서 열린 프랑스-중국 문화 원탁회의에서 자오팅양이라는 중국 철학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혁명에 대한 서로의 이견에 흥미를 느끼며, 옛 학자들처럼 서신을 통해 좀 더 심도 있는 토론을 지속하기로 했다. 혁명가와 철학자의 난해한 대화와 직역에 가까운 번역 탓에 보통 사람들이 이 책을 이해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변화는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의 진심 어린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섯 번의 편지 교환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고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토론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그 문제를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하며 이 편지 교환을 마무리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세상에 변화는 꼭 필요하지만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산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지속적으로 변화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노화도 그 변화 중의 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늙는다는 것은 죽음을 향한 변화이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변화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서는 변화할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모습이 되기 위한 변화를 추구하고, 누군가는 생활에 필요한 일을 조금씩 해결하면서 변화해 나간다. 어느 것이 더 옳다고 또는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꼭 필요한 변화라면 제도나 법률 선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 가치관, 생활방식의 개선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변화의 대상은 개인 단위가 아닌 관계 단위여야 한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제도나 법률을 바꾸고 각자의 봉급을 높여준다 해도, 노사 관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없으면,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불행해지는 현상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글로벌화(전지구화)라는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글로벌화는 선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이는 세계가 하나로 통일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세계의 통합 과정에서도 누군가에게 유리한 제도가 생기고, 통합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배척이나 억압이 생길 수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한 UN이 서양의 이익 보호에 편중되는 것이나, 절대적으로 공평해야 할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이단을 핍박하는 역사를 되짚어보면 가능한 일이다. 즉 세계의 보편화는 그것에 유리한 쪽을 변호하고, 그것을 주도하는 쪽이 또 다른 권력을 잡게 하는 양상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보편적인 글로벌화보다, 다양성, 불일치, 충돌이 존재하는 글로벌화를 지향해야 한다. 각 국가가 자신의 것을 유지하고, 자신의 것을 다른 국가에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것에 다른 국가의 것을 주입하지 않을 때 모든 국가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글로벌화라는 명목 하에 식민 역사만 되풀이될 뿐이다.


셋째, 자본주의, 자유시장, 기술이 보편화되는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자본과 기술은 사람들의 삶을 필요 이상으로 편리하게 만든다. 그래서 전 지구적으로 현대인은 자본과 기술 없이 살 수 없고, 시민이라는 이름 대신 고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자본과 기술에 대한 의존 현상은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자본과 기술의 지배를 받게 하고, 이렇게 형성된 지배구조에 대자본력과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국가가 침투하여 새로운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 그 국가는 미국이라 볼 수 있겠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현인들은 속담과 격언 등을 통해 진리를 설파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하곤 한다. 우리는 자본과 기술을 통해 넘치는 물건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삶에 길들여지고, 삶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보다 갖고 싶은 것을 요구하며 살고 있다. 이로 인해 '왜 이렇게 사는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가' 등의 삶과 생활의 의미를 반문하여 방황, 성찰을 일삼고 있다. 지금이라도 자본과 기술이 제공하는 달콤한 편의에 이끌리기보다 조금은 불편해도 삶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상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책에서 두 현인도 인류가 상상과 신화에 의해 살아왔다고 한다. 어떤 상상은 독재국가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어떤 신화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구실이 되었다. 어떤 상상은 독재나 식민 체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혁명가들의 마음을 들끓게 했고, 어떤 신화는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격동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자본과 기술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상상과 신화가 수많은 기업들로 하여금 엄청난 제품과 서비스를 계속해서 양산하게 하고 있다. 문제는 태고적에 작은 부족 단위에서 형성되던 신화가 점차 국가 또는 연합국가에 이어 전 세계 단위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편화된 세계라는 단위 상의 신화는 생명을 위한 변화에 위배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 생활한다는 것은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했다. 변화가 없으면 생명도 멈춘다. 변화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다양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보편화, 일치, 통일, 글로벌화 등의 신화는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른 나라를 망하게 하려면 반드시 그 역사부터 없애라는 말이 있다. 역사란 그 국가나 민족의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서술하는 것인데, 이것을 없애버리면 그 국가나 민족의 존재 이유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라는 야욕을 가진 국가들이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식민통치를 하다가,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지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라는 명목 하에 서로 간의 존재 이유를 잊은 채 효율과 효과만을 추구하는 글로벌화보다, 각자의 다양한 역사, 가치관, 생활방식을 인정하는 제3의 혁명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정부와 기업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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