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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May 22. 2016

우리 또한 사춘기 시절 갈망했던 자유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일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이것이 왜 고전인가 의아했다. 자고로 고전이라면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밑줄 그어 두기 좋을 명언들로 가득해야 할 터인데... 막판까지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문장 하나를 찾지 못했다. 존 레논의 암살범인 마크 채프먼이 암살 순간까지 손에 들고 있던 책이라더니, 역시 살인자의 마음을 충동질할 젊은 '또라이'의 뒤죽박죽인 정신 상태를 열거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던 중에 책의 말미에서 마침내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을 찾았다. 이야기 끝머리에 갈곳 없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엔톨리니 선생 댁을 방문한다. 홀든은 어린 동생 피비를 제외하고는, 주변 사람들을 좋게 묘사한 적이 없는데, 엔톨리니 선생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엔톨리니 부부를 '지성적'이라고까지 칭찬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밑줄긋고 싶었던 대목은 엔톨리니 선생이 홀든에게 하는 충고 속에 있었다.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닺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p. 247-248)
이건 시인이 쓴게 아니라, 빌헬름 스테켈이라는 정신분석 학자가 쓴 글이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p. 248)


나는 이 두 단락에 밑줄을 긋겠다고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래, 성숙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살아야 해', '어려움을 이겨낼 생각은 하지 않고, 비뚤어진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는 질풍노도 시기의 청소년 같으니라구!'라고 되새김질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엔톨리니 선생이 한 손에는 술잔을 든 채, 잠든 홀든의 머리를 쓰다듬어 홀든을 기겁시키는 장면에서 그 포스트잇을 즉시 떼어버렸다. 그것은 홀든의 표현대로 엔톨리니 선생이 '변태'같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권 내에서 권위나 지위가 있는 사람의 말은 곧 옳고 훌륭하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였다. 사람은 시스템에 반하는 '타락'을 절대로 해서는 안되고, '타락'이란 미성숙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라는 주입식 의식에 길들여진 내 편견에 화들짝 놀랐다. 그간의 독서나 공부를 통해 열린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고 자부하면서, 책을 읽는 내내 홀든을 비판하던 내 무지함이란!


홀든은 시스템에 순응하기보다 솔직한 태도로 살아가는 청년이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중했고, 진실로 원하면 행하고, 원치 않으면 그만두었다. 그것이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연애든, 상관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했고, 어떤 상황에서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학교에서 약하다고 따돌림 당하던 제임스 캐슬에게 손을 내밀었고, 돈 때문에 몸을 팔려고 하는 창녀와도 거래보다는 대화를 하려 했다. 보통의 어른들은 그저 어린이라고 생각하는 여동생 피비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도 홀든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가 요구하는 학교, 공부,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생각과 삶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 사회를 벗어나려고 학교나 집을 떠나봤자, 어른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저 너른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한 홀든의 작은 꿈을 알아주는 이는, 어린 여동생 피비 뿐이었던 듯하다. 어른들의 눈에는 당췌 무엇을 위해 어디로 떠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홀든을 무작정 따라가겠다고 떼쓰는 것을 보아서는 말이다. 오빠가 자신을 두고 어디 좋은 곳으로 간다고 믿지 않고서야 감히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16살의 나 또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다. 어른들이, 학교가 시키는대로 얌전히 공부만 하던 나에게 어느 날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겼다. 공부를 하는 목적을 찾아야 공부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나에게 학교와 학생이라는 신분이 답답하고 숨막히게 느껴졌다. 목적을 알 수 없어 손을 놓아버린 공부는, 주변에서 아무리 강요해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책상에 붙어있어 보아도 도통 진행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그 동안 예상했었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내 모습이 두려워, 일단 대학은 가보고 고민하자는 다급함을 갖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인생의 길을 걷고 있었을까. 그 때 일시적인 두려움으로 다시 시스템에 안착해버린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동일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돈을 벌고, 번만큼 쓰며 사는 삶이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매일 반복하면서.


그러고보면 질풍노도란 청소년기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닌 듯 싶다. 시스템화 되어버린 사회에서, 이를 벗어나 자유롭고 의미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방해하는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홀든만큼 완강하게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거듭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가? 더 나은 길은 없을까? 혹시 다른 길이 있지는 않을까?


이 책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구절은 딱 한 번만 등장한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라는 여동생 피비의 질문에 홀든은 학교에서 왕따와 구타를 당하다가 자살을 한 제임스 캐슬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있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같겠지만 말이야. (p. 229-230)

홀든의 장래희망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뛰놀게 하고, 그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가이드만 해주는 '어른'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호밀밭 같은 세상에서, 파수꾼 같은 어른이 있었다면 제임스 캐슬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책이 1951년에 출간되었으니, 홀든의 꿈은 1950년대 청소년들의 꿈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때보다 66년이 지나, 경제와 기술이 발전한 2016년 청소년들의 꿈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청소년들의 호밀밭에 대한 동경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돌봐주기보다, 자신들의 삶을 '제조'하려 드는 어른들의 지나치리만큼 강력한 '파수꾼'으로서의 직업의식 때문에.


나를 포함한 우리 어른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자유로웠는지, 그 때 우리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옳았는지. 그렇게 자라온 지금의 우리는 자유로운지,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으로 비추어지는지. 우리가 열심히 만들어온 경제적 풍요와 기술적 편의로 가득한 세상은 홀든이 상상하는만큼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호밀밭인지. 우리들은 아이들의 위험만 막아주는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본주의와 성장의 한계가 많이 지적되는 시대이다. 이럴 때 사는 것이 바쁘다고, 그냥 살아가기만 해서는 안된다. 반추없는 삶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그런 삶은 잘된 것에 대한 지속이나, 잘못된 것에 대한 교정없이 전진만 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 악화된 건강을 발견하는 것도 그런 맹목적 전진의 결과이지 않은가.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며 시류에 편승하거나,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만 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 삶에 대한 반추와 질문을 반복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에게는 넓고 정의로운 호밀밭을 만들어주기 위한 일을 하고, 그 위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삶을 지속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없이 자본주의, 성장주의, 성공주의에 편승하는 모습은 아이들의 눈에 그저 엉터리로만 보일 뿐이다. 홀든의 생각처럼.

변호사는 괜찮지만... 그렇게 썩 끌리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다거나 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만은 없게 되거든. 일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몰려다니면서 골프를 치거나, 브리지를 해야만 해. 좋은 차를 사거나, 마티니를 마시면서 명사인 척하는 그런 짓들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 건지, 아니면 굉장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그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된다는 거지. 말하자면, 재판이 끝나고 법정에서 나올 때 신문기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환호를 받는 삼류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는 거 말이야. 그렇게 되면 자기가 엉터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게 문제라는 거지. (p.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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