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몇 년 전까지 우리집에서는 개를 길렀다. 고등학교 시절 남동생이 아버지를 졸라 '퍼그'라는 강아지를 사왔었다. 쭈글거리는 주름 속 커다란 눈망울이 너무나도 예뻤던 암컷이었다. 못생긴 물건의 이름을 본따 재미있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수세미의 '수'자만 빼고 세미라는 이름을 골랐다. 우리 가족은 약 18년간 그 이름을 불렀다. 개라는 동물의 평균 수명에 비하면 세미는 꽤 오래 살았다. 하지만 세미에게도 생의 마지막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시름시름 앓는 시간이 몇 일이나 지났고, 어느 밤에는 옆으로 드러누워 하품을 하는데, 그 하품이 끝내면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나는 세미를 세차게 흔들어 숨을 고르게 했다. 다행히 세미는 하룻밤을 버텨냈지만, 또 하루를 버티기엔 짧은 숨이었던지,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품을 하듯 마지막 숨을 들이쉬던 세미를 떠올렸다. 그 때 세미를 흔들던 내 행동을 말로 표현한다면 이것이겠구나 싶었다. '생을 붙들다'.
생을 붙들다
어린 모모의 눈에 생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는 육체를 쓰윽 지나가는 제3의 존재인 것처럼 묘사된다. 모모는 생이 로자 아줌마를 짓밢아 지금같이 추한 모습을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대체로 스스로가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것은 때때로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 생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신체를 숙주삼아 기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모는 그 어린 나이에 이를 알아챈 것만 같다.
생이라는 존재는 나라는 신체를 숙주삼아 기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밀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자신의 틀을 깨고 싶었던, 이 책의 실제 저자 로맹가리는 강박증 환자였던 듯 싶다. 무던히도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 짧은 생도 스스로 마감했다. 글쓰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꽤나 퍽퍽한 삶을 살았던 듯한 작가의 글이라서인지, <자기 앞의 생> 속 모든 인물들은 정상적이라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나치의 학대를 견뎌낸 유태인, 창녀, 창녀의 자녀, 창녀의 자녀를 돌보는 흑인 노인, 차별받는 이주 아프리카인, 여자가 되고 싶은 흑인 남자, 창녀인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 이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이란 가히 밑바닥 인생의 총집결이라 할만 하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판단 기준을 버리고, 가만히 그들의 삶을 바라보라면, 실제로 누구 하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없다. 한 때 학대당하는 유태인이자 소외받는 창녀였던 로자 아줌마는 히틀러의 사진으로 현재의 공포를 이겨내고, 창녀 시절의 젊음을 그리워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심지어 큰 보상도 없는, 손해도 큰 창녀들의 아이 돌봄이라는 직업을 생이 끝날 때까지 놓지 않는다. 그녀는 조금은 불안해 보이지만, 절대로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 뿐만이 아니라 창녀의 아들,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라는 배경을 가지고, 14년동안 4년이란 나이마저 잃고 살아온 주인공 모모도 시종일관 밝고 순수하고 경쾌하다. 모모에게 지혜를 가르쳐주던 이웃 동네 하밀 할아버지, 무거운 로자 아줌마를 이동시키던 힘이 센 자움씨네 형제들, 아줌마의 건강을 돌봐주던 의사 카츠 선생님,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롤라 아줌마, 누구 하나 어느 순간에도 불행하지 않다. 자신들이 믿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믿고, 그 세계에서 서로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산다. 그런데 여기에서 모든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이 소설이 프랑스에서 최고 문학상을 수상했다지만, 이야기의 끝머리에 보여주는 진부한 주제의식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라니... 죽은 로자 아줌마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못한 어린 모모가 시신과 함께 몇 일을 보냈다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나 나올법한 스토리도 엽기스럽기 그지 없다. 지금까지 보아온 문학 중에서 가장 1차원적인 주제의식 표출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생이란 원래 그렇게 진부한 것이 아닐런지... 생이 우리에게 머무는 동안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원리는 가장 진부한 개념에 충실하게 사는 것임을 우린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배경에는 가슴 아픈 정치, 역사, 문화적 갈등이 깔려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 역사, 문화적 이념은 인간에게 불행이란 상처만 남겼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돈으로 여자를 사고파는 문화, 인종에 따른 차별.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에 기초해서 바라보는 책 속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남겨진 생채기에 아파하며 살아가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에 들어온 '생'에만 충실할 뿐, 그 밖의 이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생'이 내 통제범위를 벗어나거나 나를 아프게 할 때에 서로를 아끼고 돌보며 함께 살아나갈 뿐이다. '왜 내 인생은 이러하냐'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생'이 벌이는 현상을 해결하려 애쓰고,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만 모모는 '생'이 삶을 떠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생'이 들어와 살아가는 모습만 보아왔지, '생'이 떠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14년동안 본 적이 없을테니, 모모가 죽은 로자 아줌마를 앞에 두고 엽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흔히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현인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진리를 설파한다. <자기 앞의 생> 또한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 하다. 다만 생에 대한 욕심이 인간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주기보다, 생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께'함으로 인하여 불행하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모가 살면서 생과 이별하는 모습을 한 번쯤이라도 보았다면,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이별 또한 좀 더 유쾌하지 않았을까.
Well-being보다 Well-dying이 트렌드로 떠오르는 시대이다. 내 몸에 잠시 머무는 생에 집착하지 말고, 생이 머무는 동안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생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떠날 준비를 하며 내 앞에 있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