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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Oct 15. 2016

상상할 수 없는 심해에서의 포옹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를 읽고...

여느 때처럼 출근을 위해 지하 주차장에 내려갔던 어느 날이었다. 늘 차를 세워두는 곳으로 무심히 걸어가다 차에 무참히 밟혀버린 고양이를 보았다. 그간 찻길에서 사고를 당한 개나 고양이를 지나쳐 본 일은 있으나, 가까이에서 그 끔찍한 광경을 마주치기는 처음이었다. 아마도 어느 운전자의 시야에 미처 보이지 않아 벌어진 사고 이리라. 너무 놀란 나는 얼른 내 차로 달려가 고양이의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저녁에 퇴근해서 주차장에 들어가 보니 고양이가 있던 차리에는 옅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그 광경을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어 슬프고 무서웠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활에 치여 죽은 고양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은 그 자리는 지하 주차장 입구의 오른편에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절대로 주차장에 들어가서 우회전을 하지 않는다. 혹시 그쪽에 있는 다른 고양이를 내가 치지 않을까 무섭기도 하고, 그 자리만 지나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작은 고양이 한 마리의 죽음을 목도한 마음도 이러한데, 차가운 바다에서 가족을, 특히 채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아이를 잃은 부모는 작은 물가 곁이라도 걸을 수나 있을까. 일반인이라면 잠시도 있기 힘들 차갑고 무거운 심해에서 216여 구의 굳어버린 시신을 마주하고 품에 안고 올라와야 했던 잠수사가 삶의 터전이던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을 우리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21세기에 대관절 이게 무슨 인이란 말인가. 비행기로 다른 나라로 날아가는 것으로도 부족해 우주로까지 날아가는 시대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300여 명의 사람들의 숨이 끊길 때까지 뜬 눈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기가 막힌 또 한 가지 일은, 물속에는 들어가지도 않은 물 밖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가 한 일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일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어느 잠수사가 죽었다더라' 정도만 알 뿐 그가 어떻게 죽음에까지 이르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왜 잠수사가 되었는지, 잠수사는 무슨 일을 하는지, 왜 맹골수도로 갔는지, 그곳에 가서는 어떤 일을 했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물속에서 바라본 침몰한 세월호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 속에서 만난 시신들은 어떤 상태였는지, 어떻게 그 시신들을 모시고 올라왔는지, 올려 보낸 시신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에서 나온 후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 책을 접하기 전 작가 김탁환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은유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할까 고민도 했었으나, 준비 과정에서 사실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내용이었다. 해외에서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 문화가 이미 자리를 잡았다는 조금은 부러움이 담긴 구절도 있었던 것 같다.


그즈음에 '터널'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우연히 터널을 지나던 어느 영업사원(하정우 분)이 무너진 터널에 갇힌 후 구조되는 과정에서 터널 안팎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다룬 영화였다. 내 눈에 터널에 갇힌 하정우는 세월호를 탄 사람들, 터널 밖 하정우의 아내(배두나 분)는 세월호 유가족, 터널구조 중에 목숨을 잃은 공사 직원은 세월호 구조 중에 숨진 잠수사, 네 남편 하나 구하자고 내 아들이 죽어야 하냐며 배두나에게 계란을 던지던 공사 직원 어머니는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는 국민들, 부실 터널을 만들고 허가하고 구조보다는 돈과 지위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기업인들, 공무원들, 정치인들은 지금의 기업인, 공무원, 정부와 같이 보였다. 스크린을 저 앞에 두고 멀찍이서 바라보니, 세월호 사건의 모든 정황이 제대로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조만간 <거짓말이다>를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거나, 지속적으로 세월호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관객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의심스러웠다. 감독의 의도는 매우 훌륭했지만, 은유를 통한 전달 방식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김탁환 작가의 선택에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이 책은 해저에서 다리를 놓는 등의 산업 공사가 필요할 때 일하는 민간 잠수사 나경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경수라는 인물은 故 김관홍 잠수사를 모델로 만들어졌고, 배경은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세월호 침몰 사건이다. 나경수가 민간잠수사를 지휘했던 선배 류창대 잠수사의 소송(류창 대의 과실로 민간 잠수사가 숨졌다는 소송이다)에 대해 탄원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물 밖에서 있었던 일들보다 물속에서 있었던 일들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물 밖에서 숨 쉬고 있는 우리들이 그리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러나 하늘나라로 간 피해자들마저도 가장 알리고 싶을 물속 이야기가 책 속에 가득하다.


소설의 줄거리를 정리해볼까도 생각했다. 대한민국에 이 사건의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고, 민간잠수사의 고충을 부족한 내 글로 요약할 수 없었다. 다만 정말 중요하지만 몰랐던 몇 가지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첫째, 민간 잠수사들은 뜬소문을 통해 알려진 대로 시체 한 구당 500만 원은커녕, 아무런 계약 없이 잠수를 하러 진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산업 잠수사가 된 뒤, 일당이나 성과급을 문서로 계약하지 않고 심해로 내려가는 첫 잠수구나. 터득한 기술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그 기술을 활용하여 참사에서 희생된 이들을 수색하고 수습하는 것 역시 처음이고.' (p. 50)

대가가 없으면 그렇게 험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일부 얄팍한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모름지기 사람이란 돈보다 의미 있는 일에 가치를 두는 법이다. 민간 잠수사들은 그저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의미 있는 일에 활용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정두야! 작년 봄 맹골수도로 내려오란 권유를 받고 내가 무슨 생각한 줄 알아? 간단해. 이게 옳은 일인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 지금도 마찬가지야. 옳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난 할 거다." (p. 331) 


둘째, 이것이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우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민간 잠수사도 심해에서 시신을 모시는 일은 처음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시신을 모시고 나오는 방법은 오로지 시신과의 단단한 포옹뿐이었다는 것이다. 김탁환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포옹'으로 하려 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여러분이 도착한 오늘까지, 선내에서 발견한 실종자를 모시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채 모시고 나온다! 맹골수도가 아니라면 평생 하지 않아도 될 포옹이지. 이승을 떠난 실종자가 잠수사를 붙잡거나 안을 순 없으니, 이 포옹을 시작하는 것도 여러분이요 유지하는 것도 여러분이며 무사히 마치는 것도 여러분이다. 산 사람끼리 껴안을 때보다 다섯 배 이상 힘을 줘야 해. 게다가 멈춰 서서 편히 안는 게 아니라, 안은 채 헤엄쳐 좁은 선내를 빠져나와야 한다. 끝까지 포옹을 풀어선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이동 중에 실종자의 몸이 장애물에 부딪혀 긁히거나 찢긴다면 여러분은 평생 그 순간을 후회할 거다. 포옹하는 장소는 얕게는 20미터 깊게는 40미터가 넘는 심해다. 공기통 메고 들어가서 단둘이 오붓하게 즐기는 관광명소가 아니라, 수평 가이드라인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90도로 기운 침몰선의 집기들이 언제 붕괴될지도 모르는 수중이다. 포옹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 하나의 공간, 그곳으로 가서 여러분은 사망한 실종자를 안고 나오는 거지. 다들 소문은 들었겠지만 맹골수도의 유속은 동해와 남해와 서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모시고 나오다가 선체 밖에서 놓치면 영영 못 찾는다. 다시 쫓아가서 붙드는 건 꿈도 꾸지 마. (p. 33-34)


셋째, 대부분의 직업이 경쟁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잠수사는 안전하게 더 깊이 내려가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더 낮을수록 자유로울 수 있다는 지혜를 몸소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호랑이처럼 사나운 파도 속에서 나라가 구하지 못한 200여 명의 영혼들을 건져 올렸다.

김관홍 잠수사는 산을 오르는 인간이 아니라, 바다로 내려가는 인간이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면, 보통은 경쟁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세상 풍경을 내려다보는 즐거움보다는 수면 아래에서 홀로 잠영하며 뛰노는 자유가 더 좋다고도 했다. 누가 더 깊이 내려가는지 경쟁하는 영화를 본 적도 있지만, 그는 그런 시합엔 관심이 없었다. (p. 382, 작가의 말 中)


이 책을 한 번 읽었지만, 다시 읽고 있다. 보통 다른 장편소설들을 한 번 읽고 다시 읽으면, 잊었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이야기는 한 번을 읽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물 밖에서 있던 일들은 뉴스를 통해 많이 접했고, 물속의 이야기는 충격적일 정도로 놀랍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다시 여러 번 읽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것 말고는 물속 사건을 접할 방법이 없다. 물속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녹음도, 사진도, 영상도 남아있지 않아 앞으로 뉴스에 나올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읽어보라. 꼭 읽어보라.

끔찍하다고 무섭다고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일임을 알기 위해 꼭 읽어보라.

물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함을 잊지 않기 위해 꼭 읽어보라.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키우기 위해 꼭 읽어보라.

돈과 지위를 위한 오르막뿐만이 아니라 내려가며 자유로운 삶이, 비록 이 나라 위에서는 험했을지라도 결국에는 위대함을 알기 위해 꼭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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